한밤의 도서관

꽃은 알고 있다

uragawa 2020. 4. 18. 23:30

아마 여러분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테다. 적어도 4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그렇다. 내가 죽은 사람의 비강에서 나온 꽃가루를 채취하는 방법을 개발한 뒤 여기저기서 나를 '콧구멍 여인'이라고 불렀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그것 말고도 여러 이름으로 불려봤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세계의 한 측면을 해석해 형사들을 돕는 '법의생태학자'다.
 


집 안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수사관들이 법의학을 통해 조사할 방법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집 안은 이미 지문과 DNA로 잔뜩 뒤덮여 있고, 옷의 섬유도 여기저기에 묻는다.



행동분석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 무거운 사체를 끌고 갈 수 있는 한계 거리는 약 100미터다.



오늘날 젊은이들에 비하면, 당시 우리의 삶은 낯선 이가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한 걱정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외부인은 곧 정체가 확인되었고, 조금이라도 낯이 익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나는 밸리 지역을 떠나기 전까지는 흑인을 한 번도 보지 못했고(몇몇이 카디프 선착장 근처에 살고 있었지만), 딘숲에서 프레드 아저씨를 통해 듣기 전에는 R을 굴려서 발음하는 이질적인 영어 말씨도 접해본 바 없었다. 우리 동네에는 노출증 환자 한 명이 살았는데, 다들 그를 알았고 아무도 그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지나치게 열심히 공부한 나머지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했다.



식물 왕국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막대하다. 조류와 이끼 그리고 그 친척들을 제외하면 약 40만종의 식물이 있으며 그 가운데 약 37만 종이 꽃가루를 생산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나머지는 포자를 만든다. 주기적으로 새로운 종들이 발견되며, 2015년에는 2,000종 이상의 새로운 종이 발견되었다. 한편 균류는 차원이 다른 세계다. 이들 종의 수는 수백만으로 추정된다. 매년 과학계에 새로 알려지는 종만 해도 엄청나며, 그 수는 단지 균류를 연구하는 유능한 학자들이 얼마나 존재하는지에 따라 좌우되는 듯하다. 심지어 내가 다룬 법의학 사건을 통해서도 새로운 종 몇몇이 발견되었을 정도다.



법의생태학자들이 관여하는 범위는 꽤 넓다. 만약 풀이 무성한 도랑에서 시체가 발견되었다면, 나는 그 장소를 조사해 살인범이 어떻게 이 범행 현장에 접근했다가 떠났는지에 대한 가능성을 설명해야 한다. 만약 시체가 누구인지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부패했다면, 살인이 벌어진 후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경과한 시간을 추정할 수 있다. 가끔은 정확도가 다소 떨어지지만 말이다. 그뿐만 아니다. 나는 사체를 숨긴 크고 작은 매장지를 찾을 수 있으며, 사체의 위장에 담긴 내용물을 분석해 피해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을 알아낼 수 있다. 또 컵이나 그릇에 남은 독극물이나 향정신성 식물성 물질의 잔류물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내가 하는 일의 핵심은 사람과 장소를 연결짓는 것이다.



꽃가루는 수천 년 동안이나 훌륭히 보존되기 때문에, 노스웨식스 강간 사건의 피해자와 가해자의 옷은 그렇게 중요한 증거가 될 수 있었다. 법의학 지식이 있는 누군가 자기 옷을 없애거나 다른 사람의 옷과 바꾼다 해도, 흔적 증거가 전부 사라지지는 않는다. 죽었든 살았든, 우리 대부분은 화분 화석을 자기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몸에 묻힌다. 머리카락이 없는 내 남편읜 예외지만 말이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머리카락이 함께 따라다니기 때문에, 헤어스프레이나 젤을 비롯한 어떤 제품을 사용하든 정전기 때문에 꽃가루와 포자가 끈질기게 머리카락에 달라붙는다.



썩어가는 시체에서 냄새가 나는 이유는 자가 분해와 세균 효소 작용의 부산물인 냄새가 복합적으로 섞이기 때문이다. 그 냄새는 정말 역겨운데, 냄새의 정도는 시간이 지나면서 부패가 진행되는 과정에 따라 변한다.



당신의 몸은 단지 짧은 기간 동안 당신의 것이다. 몸을 이루는 원소는 바깥세상에서 빌린 것일 뿐이며, 결국에는 돌려주어야 한다. 당신이 자기 자신으로 인식하는 실체는 사실 여러 미생물들의 집인 생태계의 집합체다. 당신이 사망해 뇌와 순환계가 회복하기 어려울 정도로 작동을 멈춘다 해도, 몸속 세균이나 균류, 심지어 모공 속의 진드기와 위장 안의 기생충은(만약 있다면) 한동안 죽지 않을 것이다.



환기가 잘 되지 않는 욕실 타일에서 자라는 검은 곰팡이 플라도스포륨 역시 균류다. 당신이 오랫동안 먹지 않고 방치한 빵에 생기는 흰색이나 녹색 얼룩과, 과일 그릇의 바닥에서 먹지 않고 방치된 오렌지에 나타나는 다양한 색조의 녹색 얼룩 역시 그렇다. 제빵업자들이 빵을 만드는 과정에서 밀가루와 물에 첨가하거나, 양조업자들이 맥주를 만드는 데 사용하는 효모 역시 균류다. 균류가 없다면 우리가 쓸 항생제도 줄어들고 거품이 나는 레모네이드며 생물학적 재료가 든 세제, 차, 커피, 나무, 꽃, 식품 저장실에 쌓인 대부분의 식량을 비롯해 현대 생활의 여러 필수품도 사라질 것이다. 우리가 먹는 동물들 역시 균류가 없으면 살아가지 못할 테고, 동물이 뜯어 먹는 풀도 자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균류에 둘러싸여 침투되어 있고, 균류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균류는 약간의 먹을 것이 묻어 있기만 하면 유리, 종이, 나무, 가죽, 심지어 플라스틱에 이르기까지 어디에서나 자라기 때문에 유용하다.



창문으로 흘러드는 햇살을 보고 있자면 그 안에 작은 입자들이 떠다니며, 조금씩 흔들리면서 소용돌이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가 들이마시는 공기에 이른바 '비산포자'가 들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테르페노이드 독소인 투존은 벨 에포크 시대에 파리 사람들이 탐닉한 압생트에 든 향정신성 성분으로 쓴쑥의 조직에 함유되어 있다. 비록 압생트는 황시증과 광기를 유발할 수 있지만 반 고흐, 고갱, 제임스 조지스, 툴루즈-로트렉, 피카소, 오스카 와일드, 프루스트, 애드거 앨런 포, 바이런 경,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좋아하는 술이었으며 가장 인상적인 사례는 살바도르 달리였다. 이 예술가들의 창의력과 표현력에 투존이라는 성분이 한몫을 했는지 여부는 궁금한 일이다.



사람들이 스스로의 현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필사적이라는 사실은 애석해 보인다. 아마도 어떤 사람들은 우리의 세상의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우리가 볼 수 있거나 볼 수 없는 모든 것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나는 가상의 공간이든 아니든 지옥이라 불리는 장소에는 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 당신과 나, 모두에게 죽음이 조금씩 다가오고 있다. 그러니 무엇보다 지금 이 삶을 사는 게 낫다.



어떤 현장에 누군가의 DNA가 존재했다고 해서 그가 그곳에 존재했음을 반드시 의미하지는 않는다. DNA는 쉽게 옮겨지기 때문이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DNA가 1차 자료에서 2차 자료로, 심지어 3차 자료로 옮겨지는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친구를 만나거나 지하철에서 인파에 이리저리 밀릴 때도 끊임 없이 DNA를 교환하는 만큼, 무고한 사람들도 쉽게 범죄에 연루될 수 있다.



법의학적 생태학, 아니면 어떤 종류의 생태학이든 한 가지 매력적인 측면이 있다면 배움이 끝없이 이어진다는 점이다. 모든 표본은 얼마간의 놀라움을 안기며, 슬라이드 보관함에서 현미경으로 직접 관찰하는 단계까지 밀려드는 아드레날린은 항상 흥분을 불러 일으킨다. 그에 따라 더 많은 것을 조사하고 싶어 안달이 난다. 보고, 기록하고, 측정하고, 해석해야 할 것이 언제나 더 있다. 자연 세계는 무한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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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은 알고 있다
- 꽃가루로 진실을 밝히는 여성 식물학자의 사건 일지   
The Nature of Life and Death(2019)



[트위터책빙고 2020]
12. 제목이 다.나.까  로 끝나는 책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분야에서
활약하시는 분의 책이라는데 어떻게 안 사요
아, 그리고 에세이라면 이 정도는 돼야지.
너무 얄팍한 에세이들 보다가 이거 보니 만족, 대만족이었다.

본인의 이야기로 시작하는데
어느새 균류에 대해 공부하고 있는 나를 발견? 했다.
띠용

이야기를 너무나 조리 있게 하시는 분이었어.



+
읽다가 뿜은 부분. 진정 실화냐

길가에서 발견된 잘린 다리에서 시작된 이 사건은 결국 상상력이 풍부한 범죄 소설가가 힘들여 지어냈을 법한 사연이 밝혀지면서 막을 내렸다. 자기 집에서 하숙하라는 친구의 초청을 받은 살인범은 집주인의 재정 상태가 부러워졌고, 여자 친구와 함께 그를 죽일 음모를 꾸몄다. 여자 친구는 그보다 무척 젊은 성매매 여성이었고 두 딸을 둔 어머니이기도 했다. 원래 정육점을 운영했고 런던 외곽의 범죄 조직에서 시체 토막 내기 전문으로 이름을 날렸던 이 살인범은 옛 친구가 잠든 사이 친구의 등을 찌르고는 시신을 조각내 여기저기 멀리 흩뜨려놓았다. 아마도 이들은 자신들이 결코 잡히지 않으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
그쵸? 일은 여자가 더 잘하는 것 같아요.

학생들은 표에 따라 교대로 범죄 현장과 영안실에 동행했다. 그 과정에서 확실히 옥석이 가려졌다. 여학생들이 실제로 더 뛰어난 반면 남학생들은 진짜 사체와 마주할 때 다소 약해지는경우가 많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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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진실은 마지막 문장에 ㅋㅋㅋ

1958년 4월의 어느 수요일 저녁, 나는 침례교 예배당에서 열린 사교 행사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나는 예배당을 좋아했고 일요일에는 두 번 참석했고, 때로는 수요일에도 참석했다. 우리는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으며 그곳에는 무척 잘생긴 남자애들도 있었기 때문에 예배말고도 참여할 만한 보상이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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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트리샤 콘웰 [시체 농장] 도 읽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