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13

온 더 무브

결국 내 성 정체성은 남이 상관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고, 비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떠들고 다닐 일도 아니지 않은가.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 에릭 콘과 조너선 밀러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우리는 이 주제를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 조너선은 나를 ‘무성애자’로 여긴다고 말했다. 나를 특히 매혹시킨 것은 감각기관의 생리학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색과 입체감과 움직임을 보는가? 어떻게 어떤 것을 알아보는가? 우리는 어떻게 이 세계를 시각적으로 이해하는가? 나는 시각편두통을 겪으면서 일찌감치 이런 의문을 품어왔다. 눈부신 지그재그 모양이 나타나는 전조aura 증상 말고도 편두통이 일어나는 동안 색이나 입체감이나 움직임을 지각하는 능력을 상실했고, 심지어 어떤 것을 알아보는 능력까지 상실했기 때문이다. 시력이 ..

한밤의 도서관 2019.07.27

비혼입니다만, 그게 어쨌다구요?!

결혼은 사실 하나의 문에 불과하다. 결혼하지 않고 싶어졌다면 열려 있던 문을 닫아두는 것뿐이라고 말하자. 이유는 단순하다. 닫고 싶기 때문이다. 아마 닫으려는 문틈에 잽싸게 발을 끼우고, 혹시 모르니 열어둔 채로 두라거나 나중에 도로 열고 싶어지면 어쩔 것이냐고 묻는 이들이 나타날 것이다. 답도 간단하다. 그때 가서 도로 열면 그만이다. 등쌀에 못 이겨 잠자코 있다 보면 당연히 해야 할 결혼을 하지 못한 사람 취급을 받게 될 테니, 결혼하고 싶지 않으면 않은 대로, 결정하지 못하면 못한 대로 분명하게 의사를 표현하자. 여성은 항상 결혼하라는 압력을 받습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는 결함이 있든지 규격에서 벗어난 사람 취급당합니다. 결혼한 여자는 남자에게 선택을 받은 여자, 여자로서 성공한 일종의 승자로 여..

한밤의 도서관 2019.07.24

하면 좋습니까?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모든 여자에게는 '자기만의 방'과 '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에게도 만약 젊은 여성들이 조언을 딱 하나 해달라고 한다면 1초도 지체없이 "돈 열심히 벌고 열심히 모으세요"라고 할 것이다.(돈의 중요함은 비혼에게만 해당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문제는 아무리 개인이 열심히 벌고 모아봤자 경제적으로 독립하기가 쉽지 않다는 거다. 가장 크게 들어가는 돈이 주거비용인데 1인 가구를 위한 주거공간은 턱없이 부족하거나 비싸다. 내 집 마련 좀 해보자고 주택청약을 들어도 1순위는 신혼부부 즉 '정상 가족'의 몫 '혼자 사는 여자'랑 '불안'은 한 몸이야, 한몸. 자웅동체!가깝게는 CCTV 하나 없는 빌라에 매일 혼자라는 불안....출입할 때 사주경계는 기본이고 밤늦게 문 ..

한밤의 도서관 2019.07.18

진짜 그런 책은 없는데요

손님 『윌리를 찾아라!』를 반품하고 싶어요 꼭이요. 점원 왜요? 손님 윌리를 찾아서요. ¶ 손님 죽은 동물을 다시 살리는 주문이 들어간 책을 추천해주시겠어요? 직원 ….손님 사람은 아니고 동물만요. 이해하시죠? 남편이 살아 돌아오길 원하진 않거든요. ¶ 손님 나는 전기가 싫습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가서는 꼭 죽잖아요. 결말이 너무 뻔하지 않냐고요! ¶ 어린 소녀 엄마, 책장 꼭대기에 꽃혀 있는 저 책들은 키 큰 사람만 읽을 수 있는 책이에요? ¶ 손님 이 오디오북을 살까 하는데요. 직원 오디오북 좋죠. 손님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낭독자가 마음에 안 들어요. 직원 그러세요? 손님 낭독자도 고를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럼 난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택할 텐데. ¶ 손님 (친구에게) 나는 실제로 일어난 일..

한밤의 도서관 2019.07.17

여기는 작은도서관입니다

공간은 사람들을 안정적으로 품어 안는다. 가정과 학교가 아닌 도서관은 누구나 평등한 관계로 지역사회와 함께 성장하는 제3의 공간이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다양한 사람이 모여 자신의 재능을 나누고 공동체를 경험할 수 있다. 작은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서고가 아니라 책이 사람들 손으로 전달되고 다시 살아 움직이게 하는 곳이다. 책이 유기체처럼 꼼지락거리고 꿈틀거리는 공간, 그곳이 작은 도서관이다. 모든 일자리가 자기 역할에 맡게 안정화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업무에 대한 전문성과 필요 인력 충원이라는 뒷받침 없이 수적인 지침만이 남는다면 어떻게 목적에 맞게 기관을 운영할 수 있겠는가? 도서관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다듬고, 도서관 운영 인력의 역할과 도서관 운영 예산 전반을 살펴야 할 것이다. 도..

한밤의 도서관 2019.07.16

안도 다다오 일을 만들다

현재 나의 사무소에서는 학생들에게 ‘서머스쿨summer school’ 이라는 체험 학습을 시키고 있다. 장기간의 방학을 이용하여 사무실에 아르바이트로 다니면서 테마를 정하고 주말 동안 교토와 나라 등의 고건축을 연구한다. 한 달 동안 현지를 여덟 번 방문할 수 있다. 꼬박 하루 걸려 철저히 연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개중의 사원에서는 그 열정에 화답하여 평상시에 볼 수 없는 곳을 특별히 보여 주는 경우도 있다. 이는 대학에서의 수업이나 독서만이 공부라고 생각하는 학생들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 된다. 열정이 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동을 얼마나 만날 수 있는가, 그리고 그런 감동을 어리고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부터 차곡차곡 쌓아 올릴 수 있는가에..

한밤의 도서관 2019.07.15

황야의 헌책방

내 생활은 ‘책’과 ‘산책’을 축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먹는 것도 아니고 일하는 것도 아니고 ‘책’과 ‘산책’에 자유로운 시간과 가진 돈 대부분을 썼다. 하지만 가진 돈이라고 해봐야 앞에서 말한 예산의 범위 안이므로 호주머니에 든 동전을 짤랑거리며 걷는 정도였다. 헌책방 앞 가판대를 뒤지고,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산책하며 그걸 읽고, 카페에 들어가 훑어보는 일의 반복. 집중해서 책을 읽으며 진보초로 가고 싶을 때는 일반 전철이 제일이다. 승객도 쾌속보다 적고 도심의 번화가, 상업 중심가를 지나는데도 한가한 느낌이 든다. 가방에는 항상 네다섯 권의 책을 넣어둔다. 나중에 안 일인데, 고서점 일에는 책의 가치를 판단하고 판매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치 없는 책을 과감하게 처분하는 것도 포함된다. 책을 사러 ..

한밤의 도서관 2019.07.14

역향유괴

대부분의 기업처럼 A&B도 모든 직원의 키보드 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직원이 A&B의 서버에 접속하기만 하면 누르는 모든 키보드가 기록되어 파일로 남는다. 사람이란 게… 지난날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을 것 같지만 돈을 벌면 이건 그때와 다른 거라고 자기한테 최면을 건다니까 주식시장에서 연구개발 증권의 신뢰가 떨어져 판매되지 않는다면 주식시장 자체가 멈춰버릴 수 있었다. 그러면 만기가 도래하는 수천억 달러의 어음이 상환되지 않아 새로운 금융위기가 시작될지 몰랐다.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그 친구들을 무시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뭐라고 해야 할까, 서로의 관점이 다르다고 해야겠죠. 그 젊은 친구들은 사실 저보다 열 몇 살 어릴 뿐인데 인터넷이라는 게 그 친구들에게는 어린 시절을 함께한 장난감이잖아요. 그 친..

한밤의 도서관 2019.07.12

유리병 편지

외로움이 온몸을 짓눌러 올 때가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런 때를 만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왜 이토록 외로운지 묻는다. 하지만 고독과 고독에 대한 의문은 별개다. 성 동정녀 교회 신도들은 가능한 한 병원을 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성모가 자신들을 지켜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티야 사이바바, 사이언톨로지, 성 동정녀 교회, 여호와의 증인, 하느님의 자녀들, 영원의 공동체 같은 이름들이 있었고 통일교, 제의 진리, 성스러운 빛의 사명처럼 그녀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다른 이름들도 가득했다. 각 단체와 조직마다 지켜야 할 계율들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들 자기 단체만이 조화와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단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에겐 즐거움이라는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

한밤의 도서관 2019.0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