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기분 벗고 주무시죠

가끔 우리는 이 리액션을 본질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어요. 화가 나서 더 화가 나고, 슬퍼서 울다 보니 더 서글퍼지는 식으로 말이죠. 감정은 충분히 표출하는 게 건강에 좋지만, 이렇게 기분 속에 갇히면 표출이 아니라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힘은 점점 빠지고 감정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말죠.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건 ‘타인을 만나지 않는’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방구석에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에너지를 쓰고 불안에 시달릴 수도 있거든요. SNS와 누군가의 카톡 하나, 애인의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벌벌 떨며 불편한 하루를 보낼 수도 있어요. 이런 경우라면 백날 천날 혼자 있어도 에너지가 충전되기는커녕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할 뿐이죠. 혼자만의 시간이란 건 물리적으로..

한밤의 도서관 2019.04.01

다시, 그림이다

런던에서 야심만만한 작품을 제작한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곳은 충분한 공간도 없는 데다가 주의를 흐트러뜨리는 것들이 너무 많았지요. 하지만 여기서는 하루 24시간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내가 자유롭게 선택한 것 외에는 그 어떤 것도 나를 사로잡지 않습니다. 그림 그리는 시간 외에는 독서를 합니다. 런던에서는 항상 손님이 있었지만 이곳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머무르는 것을 좋아합니다만, 이곳은 방문하기에 너무 불편한 곳이니까요. 나느 반(反)사회적인 사람이 아닙니다. 단지 비사회적일 뿐이죠. 이곳에서는 마음을 사로잡는 것들이 나를 위해 자라납니다. 이는 아주 거대한 주제이고, 내가 자신 있게 다룰 수 있는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자연의 무한한 다양성 말입니다. 무엇인가를 바라볼 때 자..

한밤의 도서관 2019.03.26

메리 수를 죽이고

어쩌면 성장이란 시간의 흐름이 가져오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中 지진과 쓰나미의 영향으로 노심이 융해된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쏟아져 나왔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막연하고 어렴풋한 불안을 끌어안은 채로, 뭐 괜찮겠지, 하고 암시를 걸며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경계란 항상 모호해요. 각자 자기만의 현실 인식에 따라 믿는 것을 스스로 정의해갈 수밖에 없죠.” - 트랜스시버 中 “전자서적 시대에도 소설 퇴고는 종이로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편이 머리에 잘 들어오거든. 텍스트 데이터로만 된 소설이라니 육체가 없는 인간하고 비슷하지 않아? 그건 작..

한밤의 도서관 2019.03.21

남편의 그것이 들어가지 않아

만약 오늘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하루가 된다면 내일 아침 여기를 넘으면 된다. 그러니 오늘만 힘내보자. 오늘 하루만. 죽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까. 분위기에 휩쓸려 그대로 훌쩍 선을 넘어버리지 않도록 다시금 핸들을 꽉 잡는다. 그 고지대를 만일에 대비한 부적처럼 여기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학교로 향한다. 부모님도 여동생도 동급생도 예전에 함께 일한 사람도, 나를 보면 “요즘 뭐 하고 지내”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안다. 정말 순수하게 무엇을 하는지 묻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해”라고 대답한다. 정말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오늘 낮에 집에서 뭐 했어”라고 다시 묻는다. 시간을 좁혀본들 역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어..

한밤의 도서관 2019.03.20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아르테미시아는 자신이 강간당한 사실이 진실임을 증명하기 위해 ‘시빌레sibille’라는 고문을 받아야 했다. 시빌레는 엄지 조이기 고문과 유사한 것으로 한쪽 손의 손가락들에 링을 끼우고 거기에 달린 줄들을 바짝 당김으로써 극심한 고통을 가하는 것이었다. 17세기 버전 거짓말 탐지기 테스트로 당시에는 진실을 판단하는 법적 최적 표준이었다. 시빌레에 동의함으로써 그녀는 끔찍한 고통뿐 아니라 손에 치명적인 손상이 갈 위험까지 받아들인 것인데, 화가로서는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끔찍한 운명이었다. -아르테미시아 잰틸레스키 中 1850년이 되었을 때 보뇌르는 경찰서에서 페르미시옹 드 트라베스티스망 Permission de Travestissement, 즉 ‘이성 복장 착용 허가’를 받았다. 당시 이성 복장 착용(즉,..

한밤의 도서관 2019.03.19

에센스 B국어사전

골이따분하다 (형) 누군가가 ‘고리타분하다’를 틀리게 표기한 것이 웃겨서 그대로 따라 쓰는 말. 그네어 (명) 제18대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의 알아듣기 힘든 입말을 가리키는 용어. 대표적인 예로 “우리의 핵심 목표는 올해 달성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하는 것을 정신만 차리고 나가면 우리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걸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셔야 할 것입니다”(국무회의 발언, 2015년 5월 12일)가 유명하다. 눈갱 (명) 불쾌하거나 괴로운 사진을 봐서 눈이 공격당하는 것. ‘안구테러’와 유사한 뜻을 가진 말이며, 못 볼 걸 봤을 때 이 말을 쓴다. 니디티 (명) ‘섹스’의 다른 말. 컴퓨터 키보드의 한글 모드 상태에서 ‘sex’ 를 입력하면 ‘ㄴㄷㅌ’ 가 되는데, 여기에 각각 모음 ‘ㅣ’ 를 붙인 것이..

한밤의 도서관 2019.03.18

비교하지 않는 연습

타인과 교감하면 열등감은 해소할 수 있다. 그러나 열등감을 해소하려고 상대보다 우월해지려고만 하면 열등감이 점점 심해진다. 알코올 의존증인 사람은 자신이 알코올 의존증인 것을 부정하지만, 스스로 알코올 의존증인 것을 알고 있다. ‘저 사람은 집을 샀다. 나는 열심히 사는데도 집을 사지 못했다’ ‘저 사람은 성공했는데 나는 성공하지 못했다’ ‘저 사람은 돈을 모았다. 나는 밤낮없이 일하는데 돈이 모이지 않는다’ 열등감이 심한 사람은 타인을 보면서 자신의 행복을 결정짓는다. 때문에 주위의 사람이 바뀌면 그 표적이 달라지고 그로 인해 항상 타인과 싸우며 살아간다. 만나는 사람 모두와 자신을 비교하게 된다. 애정결핍이 있는 사람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인정받고 싶어 하지만 실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

한밤의 도서관 2019.03.16

페로몬 부티크

“지독한 향수 냄새뿐이야. 죽은 샤넬이 냄새를 맡고 소환될 정도로 넘버 5와 마드모아젤 향이 넘쳐나는 군.” 페로몬 부티크관능의 집과 저주받은 능력자들 한국 소설 왠만하면 정말 안 읽으려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 말 할거야...?) 표지 디자인이랑 띠지 홍보 문구만 믿고 샀는디.... + 첫 문장부터 진입 장벽 사나흘쯤 방치한 수염과 어둡고 창백한 피부, 가르마를 타 포마드로 붙인 머리에 또렷한 눈동자, 날카롭게 내달리는 콧대의 사내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들어섰다. 그의 곁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플래티넘 블론드헤어에 미러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매달리듯 붙어 걸었다. 포마드 그렇다 치고 플래티넘 블론드 헤어 뭔데.... ㅇ ㅏ... 읽지말고 그냥 다시 팔까..... 추가로 감색 브리오니 슈트, 군더더기 없..

한밤의 도서관 2019.03.15

아흔 일곱 번의 봄 여름가을겨울

이 세상은 남은 다 좋다는데 내 마음은 왜 이다지도 복잡할까 울고만 싶네. 날짐승이나 됐으면 어디론가 훨훨 날아가 버리지. 봄철은 차츰 다가오고 온갖 새 짐승소리는 들려오는데 이 심정은 어쩌면 좋으려나. 젊었을 때 돈 못벌었으니 끝날 때까지 할 수 밖에. 언제라도 일하다가 자는 듯이 조용하게 떠났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집에 있으나 들에 가도 그 마음 변할 길 없네. 솟종새는 처량하게만 운다. 돋보기 오늘은 딸이 장에 가서 돋보기를 사왔다. 아무것도 못 보고 답답하든 차에 새로 정신이 나는 것 같다. 이제는 책도 보고. 비가 와서 그저 묵묵히 바깥만 바라보고 있으니 괜히 자식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언제나 늘 곁에 두고 싶은 맘 변하지 않는구나. 올 적에는 반갑다가 또 가고 나면 보..

한밤의 도서관 2019.03.13

회사에서 꼭 필요한 최소한의 독서법

나는 영감이나 직관력은 논리적인 사고력과 연관성을 찾는 데서 발휘된다고 생각한다. 무언가 서로 관계있는 화제가 떠올랐을 때그동안 저장해둔 지식과 데이터, 정보 등을 꺼내어 머릿속에 신호를 보내는 것... 논리적 사고력이 낮은 사람 중에 자신이 알고 있는 수준 이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진 본인이 각성하지 않으면 절대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다. 잘 모른다는 것은 글을 잘 쓰거나 조리 있게 말할 수 없고, 남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 대한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조직생활에서도 단지 선배라는 이유로 부하 직원에게 존중받으리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후배의 설명을 알아듣지 못했을 때 "내가 이 분야에 약하다"는 핑계로 잠시 피할 수 는 있다. 그러나 잘못은 제대로 설명하지..

한밤의 도서관 2019.03.08

모든 것의 시작에 대한 짧고 확실한 지식

공간, 물질 그리고 시간은 분리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우주론에서 이 세 가지는 함께 등장합니다. 우주의 기원이 있다면 그것은 곧 시간의 기원입니다. 그러므로 ‘그 이전’은 없습니다. 망원경은 일종의 타임머신, 즉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기계입니다. 역사학자들은 절대 고대 로마를 관찰할 수 없지만, 천체물리학자들은 정말로 과거를 볼 수 있고 과거의 모습 그대로 별들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리온 성운을 로마 제국 말기 때 모습으로 보고 있습니다. 맨눈으로 볼 수 있는 안드로메다 은하는 200만 년이나 오래된 이미지 입니다. 만약 안드로메다의 거주자가 지금 이 순간 우리의 별을 바라본다면, 그들도 마찬가지로 그만큼 간격을 두고 우리 별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행성 지구가 0시에 출현했다고 가..

한밤의 도서관 2019.03.07

플라워 문

미국이 독립한 뒤 오랫동안 국민들은 경찰국 창설에 반대했다. 경찰이 시민을 억압하는 세력이 될까 우려한 탓이었다. 대신 시민들은 범죄가 발생했을 때 직접 나서서 용의자를 추적했다. 이 학교의 가르침은 몰리를 백인사회에 동화시켜, 당국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오세이지족 소년들이 농사와 목공을 배우는 동안, 몰리는 바느질, 빵 만들기, 세탁 등 ‘살림의 기술’을 배웠다. “인디언 소녀들을 세심하게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루 말할 수 없다.” 미국 정부 관리의 말이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남자가 근면하게 열심히 일해서 식구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주더라도, 아내가 요리를 할 줄 모르고 바느질에 익숙하지 않고 깔끔하게 정돈하는 습..

한밤의 도서관 2019.03.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