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4년부터 ~ 1696

몽위

인간은 진심으로 오싹했을 때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공포에 쥐어뜯겨 움푹 팬 부분을 평평하게 고르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은 헛되이 하루 또 하루 얇은 종이를 떼어내듯이 흘러간다. 뭔가를 희박하게 만들고 조금씩 빛바래게 만들어간다. 기대를 품었던 시간은 실망으로 변하고 이윽고 체념에 들어간다. 마사지사에게 몸을 맡기고 끄덕끄덕 졸고 있으려니 낮에 본 몽찰의 잔재가 조금씩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반쯤 잠든 상태가 되면 히로아키는 항상 이즈미 교카의 소설이 떠오르곤 한다. 수술실에서 마취주사를 맞으면 자칫 마음속에 감춰진 비밀을 고백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혹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비밀을 감춰두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

한밤의 도서관 2014.12.01

살인마 잭의 고백

미쿠리야는 장갑을 벗으며 석연찮은 듯이 말했다. 이 또한 이 사람에게선 좀처럼 볼 수 없던 말투였다.“난처하게 됐습니다.” “소화기관에는 위, 장 소장, 대장, 췌장, 간이 있습니다. 순환기관에는 심정, 비장, 신장이 있고요. 호흡기관이라 하면 폐, 비뇨기관에는 요관에서 방광까지 있을 테고요. 생식기관은 난소 자궁이 있습니다만, 장기란 장기는 죄다 적출된 상태입니다. 잘 아실 테지만 사망 추정 시각이라는게 직장直腸 내 온도를 측정해야 알 수 있는 것인데, 이건 뭐 직장 자체가 없으니…. 음식이 소화된 상태라도 알아보고 싶은데, 위가 있어야 말이죠.” 익명성은 안전지대의 다른 이름이다. 그리고 인간은 안전지대 안에서 마음껏 악의나 독선을 드러낸다. 그 과격함에 흠뻑 취한 채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에 희열을..

한밤의 도서관 2014.11.26

모즈가 울부짖는 밤

이대로 야음을 틈타 도망치기는 쉽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는다. 놈들은 계속해서 그를 찾아내 죽이려 들 것이다. 영문도 모른 채 쫓기고 위협당하며 살아가긴 싫다. 어떻게든 여기서 결판을 내야 한다. 무로이는 진땀을 흘리며 제 몸을 지키려는 듯 주먹을 쥐어 가슴 가까이 끌어당겼다.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피고인처럼 보였다. 조금 전까지의 의연한 태도는 어디가고, 그 곳에는 죽음의 공포에벌벌 떠는 초로의 남자만 있었다. 단정한 얼굴이 일그러지고 땀에 젖은 백발이 이마에 달라붙었다. 보고 있기 애처로울 정도였다. “쏘지 마십시오. 보면 알잖습니까. 무로이 부장은 이미 죽었어요. 빈껍데기를 쏴봤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아니요, 쏠 겁니다.”구라키가 스스로 다짐하듯 내뱉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

한밤의 도서관 2014.11.25

다크 플레이스

죽은 우리 가족이 최고라는 일그러진 애정이 샘솟았다. 순간적으로 엄마의 모습이 떠올랐다. 붉은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엄마는 내가 얄팍한 겨울 부츠를 벗는 걸 도와주었다. 그러고 나서는 내 발가락 하나하나를 손으로 따뜻하게 비벼댔다. “먼저 엄지발가락을 따뜻하게 하고, 이번에는 새끼발가락.” 이 장면에서 버터 바른 토스트 냄새가 났지만, 실제로 그런 토스트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이 기억 속에서 내 발가락은 아직 모두 성한 상태였다. 거실에 책장들이 죽 있었지만, 꽂혀 있는 책이라고는 자기계발서 밖에 없었다. 《햇살을 열어젖혀라!》, 《파이팅 걸》, 《자책은 이제 그만》, 《일어서서 당당하게》,《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자》,《뒤돌아보지 말고 앞으로!》계속해서 기운을 북돋우는 당찬 제목들이 주르륵..

한밤의 도서관 2014.11.20

신의 카르테

출발의 벚꽃이다어때? 神様のカルテ (In His Chart) [신의 카르테] 2011 • 감독 : 후카가와 요시히로 • 원작 : 나츠카와 소스케 • 출연 : 사쿠라이 쇼, 미야자키 아오이, 카나메 준, 이케와키 치즈루, 키치세 미치코, 카가 마리코, 에모토 아키라 ㅋㅋㅋ 책 읽고 보려고 하는 바람에 드디어 보게 됨 그 사이 이 영화는 2편도 나왔지....... 쇼 빰마머리 귀여움.ㅋㅋㅋ 이케와키 치즈루도 나온다! 아니 얘는 뭘 먹고 살길래 동안 인거야...?? +개인적으로 책을 읽고 느낀 건자신의 아내(외모)나 아내의 직업, 살고 있는 공간실제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이 한껏 꾸며낸 듯한 느낌이 들었는데, 영화는 더 꾸며 댄 듯한 느낌이 들었음. 특히학사님이랑 헤어질 때,자신의 집이 아닌데도 저렇게 물감 ..

먼지쌓인 필름 2014.11.16

두번째 코

내게도 그런 인생을 보내라는 건가. 농담 마라.아버지는 의무교육이 끝나자마자 조그마한 마을 공장에 취직해 정년까지 거기서 일했다. 평생 이루어 낸 일을 들자면 그저 가족을 먹여 살리고, 불면 날아갈 듯한 이 작은 집의 대출금을 변제했을 뿐인 시시한 남자다. 환경 선진국인 이 나라에 이미 화력발전소는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전력은 원자력 발전소와 ‘인발’이라고 불리는 인력 발전소에서 공급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편지에 형은 상장이 취소된 후 칸토무라 인발에 보내졌다고 적혀 있었다. 그곳에서 사회를 위해 죽을 때까지 발전용 자전거를 밟는 것이다. “인발이라고 해도 말이죠. 이제 자전거를 밟는 시대가 아닙니다. 이건 휴머놀이라고 해서, 인간을 원료로 한 새로운 바이오 연료입니다. 이 병 속에 들어 있는 건 ..

한밤의 도서관 2014.11.15

파이브

베아트리체는 그날 이후 이 곡을 다시는 듣지 않았지만 음 하나하나가 귀에 익고, 가사 하나하나가 가슴을 파고들었다. 몇 달 동안이나 남아서 맴돌았던 향냄새, 꽃과 슬픔의 냄새, 특히 혀에 느껴지는 쓴 금속 맛. 죄책감이란 천천히, 끝까지 맛보게 될 무엇이었다. 그 남자. 왜 내 머릿속에서는 범인이 늘 남자일까? “어제…… 노라의 시신을 확인했어요.” 그는 쥐어짜듯 단어 하나하나를 말하는 것 같았다. “아내가 맞았어요…… 그리고 아내가 아니었어요. 예전의 노라가 더는 아니었어요.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이제는 사람이 아니었어요. 그냥…… 사물이었어요.” 그의 온몸이 한 번 떨렸다. 그는 몸을 돌려 바지에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베아트리체는 그가 다시 진정될 때까지 기다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알아..

한밤의 도서관 2014.11.15

날개 달린 어둠

“창아성에 장미는 피지 않아요. 유가오 씨. 붉은 장미도 노란 장미도 파란 장미도…… 검은 장미조차도.”빛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은 피지 않는다. 태어나는 건 하얀 알비노 뿐이다. “지금까지의 얼개로 흘러간다면 하얀 까마귀도 사라져버리겠죠.” 의외의 말이었다. 평면 세계를 이야기하던 중에 느닷없이 시계열時系列이 끼어 들었다. 기사라즈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척……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가 할 말을 떠올리는 데 일 초씩이나 걸릴 리 없기 때문이다. “글쎄.” 언제나 그런 말만 앞세운다.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는 뜻이리라.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뜨뜻미지근하지만 등줄기를 싸늘하게 식히는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익, 하고 불길한 울림을 내며 출구 쪽으로 흘러간다. 푸른 까마귀의 발소리일까? 계단을 내려갈수록 흙..

한밤의 도서관 2014.11.06

신의 카르테

이럴 때일수록 내 입에서는 제대로 된 말이 나오지 않는다.“짧은 만남이었지, 학사님.” 나는 쓸데없는 말을 거듭하기를 포기하고, 조용히 빛바랜 단행본 한 권을 책상 위에 두었다. 시마자키 도손의 『동트기 전』. “박식한 학사님에게 줄 책이 좀처럼 없어서 말이야.” “저한테요?” “읽은 적은 있겠지만.” “꽤 옛날입니다.” 학사님의 흰 손이 『동트기 전』의 낡고 붉은 표지에 닿았다. 몇 번을 넘겼는지 알 수 없는 표지이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때가 묻고 마모되어 너덜너덜해졌다. 상하권으로 나뉘어져있었을텐데, 수중에 남은 건 상권뿐이다. “괴로운 이야기야.” 내 말에 학사님이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결코 재밌는 이야기도 아니고 기분 좋은 이야기도 아니야. 갈등과 고뇌가 한없이 계속되는 이야기지. 그 괴로..

한밤의 도서관 2014.11.03

탐정은 바에 있다

“모르겠어. 뭔가 있으면 전화할게.”“이제부터 어떡할 거야?” “그래. 언제든지 연락해. 이봐, 기운이 없어 보이는군.” “살아 있다는 증거라고.” 마쓰오는 히죽 웃고 밖으로 나갔다. “들어봐, 나는 알코올중독은 아니라고. 그냥 알코올의존증이야. 알코올중독이 아니라고. 그 둘은 큰 차이가 있어.” “그건 몰랐네.” “모르는 녀석이 꽤 있지. 그리고 말이야. 아무리 마셔도 간이 상하지 않는 비법이 있어. 그거 알아?” “몰라.” “당신도 술꾼이라면 알아두는 편이 좋아. 단백질이야.” “오호.” “단백질을 먹으면서 마시면 말이지. 간은 불사신이라고.” 나는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 전화의 좋은 점은 친한 친구가 손을 흔들거나 등을 돌리거나 걸어서 떠나가거나 하는 모습을 지켜보지 않고도 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한밤의 도서관 2014.10.24

1의 비극

내 마음 속에 죄책감을 가리키는 미터기가 달려 있다면, 이 순간 바늘이 크게 왼쪽으로 꺾이며 일단 제로를 가리켰을 것이다. 하지만 바늘은 금세 오른쪽으로 돌아가 임계점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나는 내 생각과는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시게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이 형용할 수 없는 뭔가에 의해 흐려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미우라를 쉬지않고 가격한 오른손이다.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이 들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폭력 그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다. 오히려 폭발의 방아쇠가 된, 내면에 존재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화감이었다. 목격_부상한 남자 “밀실이란 추리소설에서 쓰는 기법의 하나로, 닫힌 공간에 타살 시체가 있지만 범인이 없고 심지어 침입이나 탈출 흔..

한밤의 도서관 2014.10.21

그 무렵 누군가

“들어봐. 다중 인격자인 척하면서 범죄를 저지른 건 나의 ‘또 다른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어. 그러면 이런 건 어떨까. 원래 성격이 광폭한 인간이 사람을 죽인 뒤에 온화한 인간인 척하는 것. 그리고 광폭한 짓을 한 건 다른 인격이었다고 주장하는 것.” -레이코와 레이코 中 “바로 그거야, 머시. 요즘 범죄자들은 어찌나 독창성이 없는지 한다는 수법이라는 게 고작 선배들 흉내고, 심지어 트릭도 제대로 준비하지 않고 사람을 죽인다니까. 내가 현역일 때는 범죄자들에게도 예술가로서의 자존심이 있었어. 물론 그들의 작품에도 결함은 있었어. 그래서 결국에는 나에게 간파당해 버리고 말았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런 결함도 화려함을 추구하느라 생긴 필요악 같은 것이었어.” -명탐정의 퇴장 中 올해 초 구입한 ..

한밤의 도서관 2014.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