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굽이치는 달

uragawa 2015. 7. 18. 19:30

“팀장님…….”

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참, 맨살을 드러낸 콘크리트가 유난히 차가웠다.

“그러고도 월급 받는 거, 고마운 줄이나 알아. 죄다 지들 멋대로 불평이나 하고.”

수고했어.

이치코 팀장은 마지막에 그렇게 내뱉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2차  나갈 때 뿌리는 오드투알레트 향수 냄새가 떠돌았다. 이런 것이 전무가 말하는 성인 사회라면 기요미는 자신이 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로 어중간한 자리에 한숨만 쌓여가고있었다.

아, 싫다.



혹시 이사무의 아이가 생기더라도 자신은 낳지 않을 것이다.

그런 임신은 단순한 ‘실수’일 뿐이다. 내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은 남자’에게 온몸을 던져 의지할 수는 없다. 쓰레기통 속의 둘둘 말린 열성의 잔해가 자기 자신인 것만 같아서 기요미는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1984 기요미 中



바다와 하늘의 경계에서 별이 깜빡였다. 만남의 달빛은 눈에 부시다.

이토록 달콤한 낙원인데, 바다 위에는 사과나무를 찾을 불빛이 없었다.



다 그렇고 그렇지 뭐.

모두들 그렇게 말하면서도 ‘나만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또 다른 사랑의 예감이 들기만 하면 유부남과의 관계 따위, ‘기간 한정의 축제’로 당장 끝낼 수 있어.

여자끼리의 모임은 그런 식으로 늘 즐거웠고, 나만은 불행하지 않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넘쳤다.



“아니 그렇게 나를 좋아한다면서도 임신했다고 말하니까 그냥 어디로든 도망쳐버리고 싶다는 거야. 근본 바탕은 다니카와 선생하고 똑같아. 근데 너무 정직하게 얘기하니까 나도 진지해졌어. 무엇에서 그렇게 도망치고 싶으냐고 물었더니, 나한테서도 배 속 아이한테서도, 집에서도, 모든 것에서 도망치고 싶대. 혼자 보냈다가는 이 사람 죽을 거 같아서 나도 그때 각오를 하고 함께 도망치겠다고 했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준코가 말하는 ‘행복’이 슬픈 것인지, 갈기갈기 찢긴 우월감이 쓸쓸한 것인지, 준코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남자들의 비겁함이 가증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문득 깨닫고 보니 준코의 이름을 부르며 울고 있었다.

-1990 모모코 中



서로 간에 끌린다는 얘기는 입 밖에 낸 적이 없다. 요즘에는 가슴팍에 뛰어들지 않고서도 마음을 전하는 기술을 찾게 되었다. 나이 들어 좋은 점도 많다고 야요이는 생각했다.



“자신의 배역을 충분히 이해하면 크게 실수하는 일 없이 넘어갈 수 있습니다.”

-1993 야요이 中



“아아, 라니, 그게 뭐야?”

이런 식으로 금세 알아듣는 건 불쾌하다. 대표로 입을 연 것은 모모코였다.

“다니카와 선생답구나 하고 딱 감이 왔거든. 많잖아, 어떤 일에든 답을 내주지 않는 남자. 죄다 여자한테 맡겨버리고. 하지만 결혼은 그런 남자가 좋은 거 같아. 오래 같이 살자면 일일이 반응하지 않는 남자가 제일이야. 서로 간에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게 없잖아. 미나에한테는 그런 남자가 딱 좋아. 자상한 남자라는 게 대가는 별 볼 일 없는 법이야.”



“미나에, 이제 끝나버린 시간은 받아들여. 다니카와에게 꼭 확인할 게 있다면 정식으로 물어보고. 괜한 자존심 내세울 필요도 없고 지나치게 애쓸 필요도 없어. 남한테 지기 싫다는 것도 그만 놔버려. 바보라고 하면 그래, 바보인 것도 괜찮아. 고등학교 때부터 좋아했잖아, 이십 년씩이나 바보짓을 했다면 그건 진짜 대단한 거야.”



어린아이가 어른이 되듯이 열등감이 포용력이 되고 사랑은 착각으로 그 모습이 바뀌어도 마이너스와 플러스를 되풀이해가며 정답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 결혼은 빈칸을 채우는 시험문제다.

-2000 미나에 中



탈의실 로커에 감색 방한복을 둘둘 말아 넣었다. 연말에 시즈에 곁을 떠난 남자가 깜빡 잊고 놓고 간 방한복이다. 트럭 운전기사였는데 함께 산지 십 년 만에 새 여자한테로 가버렸다. 시즈에가 50, 남자가 40일 때는 그나마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60에 50이 되고 보니 관계도 의식도 두 배로 어긋나는 모양이었다. 새 여자는 삼십 대라고 하니 어떤 악다구니를 퍼부어본들 시즈에 자신만 비참해질 뿐이다.



물일에 언 몸을 녹여줄 욕실조차 없는 연립에서 살고 있다. 텔레비전 앞에서 어느 틈에 죽어버린 자신을 떠올리곤 한다. 생각하기 시작하면 상상 속에서 제 몸이 점점 썩어간다. 그 끝에는 썩어가는 냄새까지 코끝에 감돈다.

갑자기 모든 것이 더럭 겁이 났다. 혼자 사는 것도, 혼자 죽는 것도, 내일 다시 관절이 저릴 만큼 차디찬 물에서 야채를 씻어야 하는 것도, 어느 누구도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도, 모든 것이 공포였다.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제 얘기만 늘어놓으며 공감해주기를 원하는 파트타임 동료들의 대화도 이 모자간에 비하면 처세술이 뛰어난 것처럼 느껴졌다. 시즈에는 오랜 파트타임 생활을 하면서 그곳에 모인 여자들이 서로 얼마나 불행한지 경쟁하듯이 늘어놓는 장면을 수없이 보아왔다. 저마다 불행을 입에 올리면서 자기 쪽이 그나마 조금 낫다고 생각하는 얼굴들이었다.

-2005 시즈에 中



휘어지는 게 싫었다. 그래서 남자도 금세 잊을 수 있었고, 두 번 다시 똑같은 전철을 밟지 말자고 결심한 뒤로는 사랑도 하지 않았다.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휘어질 거라면 아예 똑 부러지게 꺾어지라고 늘 말한다.



통화를 마치고 곧 텔레비전 스위치도 꺼버렸다. 조용해진 방안에 도로를 달려가는 차 소리가 울렸다. 밤에는 소리 하나하나가 조용히 저마다를 주장하는 것 같다.



문득 내일 죽을지도 모르는 자기 자신을 상상했다. 준코의 모습에 자신의 내일을 겹쳐 보고 있었다. 아, 우리도 벌써 그런 나이인가. 나름대로 납득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래도 어디에 풀어야 좋을지 모를 분노가 가슴속에 먹먹하게 차올랐다. 너무도 부조리하다. 이 세상의 ‘조리條理’라는 게 가슴속에서 와르르 무너져 내린다.



일단 말을 꺼내면 온몸에서 외로움이 쏟아져 나올 것 같았다. 몇십 년째 만나지 못했었는데, 라고 생각했다. 목숨의 마지막 시간 단 한 번의 재회가 준코에게는 무엇을 남겼을까.

-2009 나오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