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천국여행

uragawa 2015. 7. 11. 22:30

장작불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주위는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짙다.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밤의 깊이에 아키오는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있다. 새겠지. 깍깍 소리가 비명처럼 들린다.



녹음이 발산하는 농후한 냄새 속을 아키오와 청년은 터덜터덜 걷는다. 나뭇잎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지면에 내리쬐는 햇빛이 흑백의 감옥 같은 문양을 공중에 그린다. 이끼에서 증발하는 수분이 풍경을 흔든다. 모습을 볼 수 없는 새가 울고 어디선가 짐승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다.

끝이 없는 나무의 바다를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간다. 이 세상에서 언어를 가진 생물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

꽤나 오래 걸은 것 같은데 나무의 바다 주변부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시간도 거리도 방향 감각도 인식의 틀을 훌쩍 뛰어 넘는다.

아마 사후 세계에 와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걱정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인생을 살아간다는 게 어떤 건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왜?”라고 생각될 정도의 이유 때문에 사람들은 목숨을 버리기도 한다. 괴로움이 늘 상대적인 것은 아니다. 혼자 받아들이고 방황할 수밖에 없는 종류의 괴로움을 안고 있기에 아키오도 청년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나무와 바다 中



이 나이가 되니 젊은 시절이 꿈이었거나 예전에 읽은 소설 속에서 일어났던 일인 것만 같소. 기억을 공유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기 때문일지도 모르오.

이를테면 100년만 지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 사랑과 그에 따른 행동들을 그리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으니 사람이란 참으로 이상한 동물이오.



당신이 말한 대로 죽으면 모든 게 끝이지. 잔소리를 늘어놓는 일도 들을 일도 없고, 매달 생활비 때문에 골치 썩을 필요도 없이 아름다운 마음만 간직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우리는 아직 살아 있소.



이렇게 되고서야 비로소 확신을 갖고 말할 수 있겠소. 당신은 소중한 사람이라고. 좋아한다거나 사랑한다는 달콤한 말을 넘어 당신의 불평과 잔소리까지 포함해 당신을 소중하게 생각하오.

당신과 만나 당신과 살았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이 세상에 생을 부여받은 의미와 모든 감정을 맛보았고 알 수 있었던 것이오. 당신에게 나도 그런 존재였으면 얼마나 좋을까.

-유언 中



고헤이가 어떤 얼굴인지, 늘 제대로 볼 수 없다. 꼭 나무 그늘에서 서 있거나 강한 햇살에 눈이 부셔 잘 안 보이거나 어두운 강가를 둘이서 묵묵히 걷거나 하기 때문이다. 고헤이는 리사를 ‘오키치’라고 부른다. 그렇게 불릴 때마다 오키치의 마음에는 기쁨이 흘러넘친다. 이 사람이 정말 좋아 견딜 수 없다.



“니네 아빠와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남편이 벌어오는 돈으로 사는 주제에 매사 불평만 늘어놓는 여자는 결코 맛볼 수 없는 행복이다.

엄마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리사는 생각한다. 그래서 공부한다. 빨리 이 집에서 벗어나 좋은 회사에 취직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 같은 딸이 있어서 좋겠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하고 리사는 생각한다. 부모님의 노후는 외동딸인 리사가 책임져야 하는 것으로 다들 생각하고 있다. 엄마도, 친척도, 아마 아버지도. 말도 안 된다. 그야 서로 잘 지내는 부모 자식 간일 때 이야기지. 엄마의 바람은, 그것을 알고도 모른 체하는 아버지는, 유야무야된 이혼이야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다고 해도 부모를 돌보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뭐라고 할지 그것도 무섭다. 거부할 만큼의 용기가 생기지 않는다.

-꿈속의 연인 中



아침 버스에 타는 사람들은 거의 같은 얼굴이다. 다치키 선배도 그 중에 있다. 차 안에 서 있는 사람은 열 명 정도로 선배도 나도 대체로 앉지 않는다. 그래서 가끔은 선배의 옆 손잡이를 잡을 때도 있다. 선배는 언제나 왼쪽 옆구리에 납작한 학생 가방을 끼고 왼손에 든 문고판을 읽고 있다. 엄지로 기막히게 페이지를 넘기고 넘겨진 페이지는 새끼손가락 밑에 들어간다. 마술처럼 우아하고 거침이 없는 동작.



나는 이제까지와 다름없이 앞으로도 살아갈 것이다. 눈에 띄지도 않고, 누군가에게 특별한 사람이 되지도 않고, 미스터리도 비밀도 풀지 못한채 담담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불꽃 中



한 단층집에 아버지가 들어갔다. 동생을 안은 어머니의 손에 이끌려 에쓰야도 뒤를 따랐다.

집 안은 어두컴컴하고 마른 풀 냄새 같은게 났다. 그것이 그 집에 사는 까다로워 보이는 노인의 체취인지, 금색으로 듬직하게 빛을 내는 불단의 향내인지 에쓰야는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서웠다. 웃음기 한 번 없이 잠자코 앉아 있는 노인도, 열린 문 너머로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둠을 담고 있는 불단도.



살려줘, 누구든 우리를 좀 살려주세요.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몸부림을 치는 에쓰야의 발목을 차가운 손이 잡는다. 필사적으로 뿌리치고 팔을 휘두른다. 마지막 숨이 입에서 나왔다. 어두운 물에 하얗게 솟는 기포가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동생도 부모님도 그때는 머릿속에 없었다. 살고 싶었다. 그것뿐이었다. 오로지 해면을 향한 집착과 집념의 덩어리. 제멋대로이고 잔혹한 인간은 바로 나다.더러운 의지로 살아남았으니 죽을 때까지 살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래도 잘 안됐다. 즐겁게 떠들어도, 온기를 느껴도 결국에는 모든게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입을 다문 에쓰야를 보고 여자도 어색하게 입을 다물어버렸다. 마지막에는 늘 “나는 에쓰야와 어울리지 않아”, “에쓰야와 행복해질 자신이 없어”라는 말을 들었다. 에쓰야는 자신과 어울리기를, 행복해지기를 바란 적이 없다. 자신은 상대에게 기대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는 사실을, 똑같은 일을 몇 번 반복하며 깨달았다. 아무런 기대가 없는 인간이 상대방의 기대에 부흥할 리 없었다.



혼자로 충분하다. 혼자가 좋다. 사랑을 부정하는 것도, 폭력을 휘두르는 버릇이 있는 것도 아니다. 성실히 대학을 다녀 좋아하는 금속공예를 열심히 하고, 누군가에게 상처 줄 만한 말은 최대한 피하고, 전철에서 노인이 서 있으면 자리를 양보한다.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는다. 다만 특정한 누군가에게 연심을 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만에 하나 아이가 생기거나 하면 곤란하니까 섹스는 피하는 것 뿐이다. 채식주의자라 고기를 먹지 않는다거나, 간을 혹사시키기 싫어 술을 안 먹는다거나 하는 것과 같다.

-SINK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