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핏빛 자오선

소나무 숲을 벗어나 저 앞에 끝 간 데 없이 이어진 저지대 너머, 지는 해를 바라보며 가다 보니 어둠이 뇌성처럼 떨어지고, 선득한 바람에 잡초가 빠드득 이를 간다. 밤하늘에 별이 어찌나 총총한지 검은 공간이 동이 나다시피 했다. 별은 밤새 쓰라린 호를 그리며 추락하지만 그 수는 도통 줄어들지 않는다. 사람은 자기 정신은 알 가능성이 상당하지. 왜냐하면 살려면 알아야 하거든. 자기 마음도 알 수야 있지만 알기를 원치 않지. 정말 그래. 마음은 들여다보지 않는게 최선이야. 하느님의 눈은 젖어 있네. 노인이 느릿느릿 말을 잇는다. 하느님의 분노는 잠들어 있지. 인간들 앞에서 100만 년이나 잠들어 있지만, 그것을 깨울 힘을 가진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네. 지옥이 다 차려면 아직 한참 멀었지. 내 말 잘 듣게. ..

한밤의 도서관 2016.02.21

호수의 여인

“난 믿는 얘기만 기억하거든.”그는 몸을 기울여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편한 자세로 일어서 전혀 서두르지 않고 가운의 허리띠를 꽉 조인 뒤 소파의 끝으로 옮겨 앉았다. “맞아. 내가 재차 묻는 다른 이유는 자네가 지나치게 관찰을 한 게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서일세. 너무 세세한 점까지 보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만큼이나 증인으로서 신뢰할 수가 없거든. 언제나 그 중 절반 가까이는 지어내니까 말야. 주변 정황을 고려해서 정확하기 확인하는 거지. 아주 고맙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벽난로 위에 놓인 전자시계가 메마르게 웅웅거리는 소리 속에서, 저 멀리 애스터 드라이브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속에서, 협곡 너머 산기슭 위 비행기의 말벌처럼 윙윙거리는 소리 속에서, 부엌에 있는 냉장고..

한밤의 도서관 2016.02.10

시머트리

“자네, 동료들한테 미움 사는 타입이지?”레이코는 갑자기 목덜미의 땀이 쏙 들어가는 서늘함에 불쾌해졌다. 몰래 엿보려던 구멍으로 오히려 감시를 당한 기분이었다. 초조함 비슷한 불쾌한 감정이 일었다. “정의? 웃기는 소리. 사람을 죽이는 데 정의고 나발이고가 무슨 상관이야? 오직 선택일 뿐이야. 살인이라는 방법을 택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건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와 죽이려는 마음은 전혀 별개라는 뜻이야. 사람을 죽이는 데에 타당한 이유따위는 이 세상에 단 하나도 없어. 하지만 정말 사소한 이유로도 사람은 사람을 죽이는 게 현실이지. 살인의 순간에는 오로지 선택할 기회만 있기 때문이야.”-지나친 정의감 中 형사가 어떤 인물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건강하게 잘 지낼 리가 없지 않은가. 요즘 들어..

한밤의 도서관 2016.01.20

빅슬립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도 무겁다. 하현달은 달무리를 드리운 채 래번 테라스의 유칼립투스나무의 높다란 가지 사이로 은은하게 비쳤다. 언덕 아래 낮은 곳에 있는 어떤 집에서 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요란했다. 젊은이는 가이거의 집 앞 상자 모양 울타리 너머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뒤 자기 앞의 운전대에 두손을 올려놓은 채로 앞을 똑바로 보면서 앉아 있었다. 가이거의 울타리에서는 아무런 빛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갈까 생각하다가 삶이 아주 지루하고 술을 한잔 하더라도 여전히 지루할 것이고 하루 중 어떤 때라도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은 어쨌거나 재미가 없겠거니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가벼운 발걸음, 여자의 발걸음이 보이지 않는 샛길을 따라왔고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앞으로 움직였는데 마..

한밤의 도서관 2016.01.19

잔예

‘허망’은 불교용어로 진실의 반대말이다. 진실과는 다른 것, 번뇌에서 생기는 현상을 뜻한다. ‘허망견’은 잘못하여 진짜가 아닌 것을 진짜라고 믿는 것이고, ‘허망체상’은 번뇌와 선입관에 사로잡힌 눈으로 본디 존재하지 않는데 존재한다고 믿어버리는 상태나 모습을 이른다. 유령도 저주도 믿지 않는다. 그런데 ‘재수가 없다’는 말에는 마음이 흔들린다. 합리적인 설명이 되지 않는 ‘무언가’가 현상과 현상을 잇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론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이것은 나한테만 한정된 일은 아닌 듯하다. 내 주위에는 나와 마찬가지로 합리주의자가 많지만, 그래도 ‘운이 따른다’, ‘운이 따르지 않는다’, ‘인연이 있다’, ‘인연이 없었다’ 같은 말은 자주 듣는다. 남편은 나보다 더한 심령현상 완전 부정론자..

한밤의 도서관 2016.01.13

죽고 싶어지면 전화해

아무리 그래도 진짜 끔찍해요. 옛날 『여공애사』의 경영자들과 기본적으로 달라진 게 전혀 없어요. 부정(不正)은 방편일 뿐이고 법률은 족쇄로 써먹고, 아무튼 자신들이 하는 일은 국가를 위한 것이니까 찍소리 하지 마라, 우울증도 과로사도 노동자의 자기 책임이다, 마음대로 앉지 마라, 마음대로 쉬지 마라, 마음대로 밥 먹지 마라, 마음대로 살지 마라, 마음대로 죽지마라, 그런 식이에요. 놀고 있죠. 놀고 있고, 진짜 저질이고 천박해요 별것도 아니다. 칭찬해주고 허영심을 살살 긁어주면 금세 좋아 죽는 게 중년이다. 거꾸로 추어주지 않으면 외로워하고 부루퉁해지고, 중년이란 그런 것이다. 그러니까 아가씨, 돈이 없으면 보통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도 불가능해. 그런 걸 평화 치매에 걸린 이 나라 소시민들은 전혀 모르고..

한밤의 도서관 2016.01.11

걸 온 더 트레인

아름다운 햇빛과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함께할 사람은 아무도 없고, 할 일도 전혀 없다. 바로 지금의 나처럼 이렇게 사는건 여름에 더 힘들다. 햇빛이 넘쳐나 어둑한 곳은 찾기 어렵고, 모두가 밖에 나와 눈꼴사나울 만큼 정력적으로 행복한 기운을 내뿜으며 돌아다니고 있으니 말이다. 그건 진 빠지는 일이다. 그들 틈에 끼지 못한다는 건 기분 나쁜 일이다. 가끔은 내가 다른 사람과 의미 있는 신체 접촉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였던가 기억하려 애쓰다가 멈칫하기도 한다. 단순히 껴안거나, 누군가가 진심으로 내 손을 꽉 잡아준 적이 언제였던가. 가슴이 아려온다. 난 몇시간 전부터 깨어 있었다. 잠이 오질 않는다. 며칠 동안 통 자지 못했다. 불면증은 질색이다. 그것만큼 싫은 게 없다. 누워 있기는 하지만 머릿..

한밤의 도서관 2015.12.31

종이달

이거 받으면 우린 달라질 거야 아무것도 안 달라져200만엔 정도로 紙の月 (Pale Moon, 종이 달, 2014)감독 요시다 다이하치 원작 카쿠타 미츠요 출연 미야자와 리에, 이케마츠 소스케, 코바야시 사토미, 오오시마 유코, 타나베 세이이치홈페이지 https://www.facebook.com/kaminotsukimovie 결론부터 말하면난 영화보다 책이 훨씬 좋았음. 남편의 태도를 계기로 엉망진창 치닿는게 더 자세히 나와야 하는데,어린 남자애 만났다고 그저 돈을 갖다 바치는 여자로 표현 되서마음에 들지 않았음. 코바야시 사토미가 맡은 역, 은행 직원으로 인해여주 부정이 빨리 발각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는 전개였다. 소설 그대로여도 좋았을 텐데..... 치매 할머니를 위해 전화하는 장면도 없고,어린 ..

먼지쌓인 필름 2015.12.20

저물어 가는 여름

“하여튼, 스기노 사장에게 사실만 정확히 말해. 지금처럼 뻣뻣한 태도는 사장이 두 번째로 싫어하는 거야. 생각해서 말해 주는 건데, 장황하게 듣기 거북한 핑계 따위는 대지 마. 그건 사장이 제일 싫어하는 태도니까. 사과해야 한다면 확실하게 사과해. 지금까진 그렇게 기분이 나빠 보이지 않지만 네 대응 방법에 따라 어떻게 될지 몰라. 군자표변君子豹變군자는 허물을 고쳐 올바로 행함이 아주 빠르고 뚜렷함이야.” 미궁에 빠진다는 말을 하면 정말 그렇게 돼 버린다. 치요는 자주 ‘시각장애인의 마음은 눈을 감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다’라는 말을 한다. 마찬가지로 히로코의 마음이나 처지는 다른 사람이 짐작해서 알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인질을 돌려주고 몸값을 받는, 몸값을 목적으로 한 유괴는 성공할 가능성이 제로에..

한밤의 도서관 2015.12.19

종이달

닭날개살과 삼겹살, 돼지고기 다짐육이 든 팩 포장을 바구니에 넣은 뒤, 유코는 다른 진열대는 거들떠 보지도 않고 빠른 걸음으로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는 붐볐다. 유코는 앞에 선 젊은 여자의 바구니를 무심코 들여다보았다. 스파게티, 야키소바, 인스턴트 파스타 소스가 두 종류, 건포도 빵, 팥빵, 푸딩, 양파, 카레 루, 비엔나소시지에 컵라면. 그야말로 딴 데 한눈팔다가 이렇게 됩니다, 하는 전형 같은 쇼핑 목록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뭐든 장바구니에 넣는 데서 벗어난 해방감과 쾌감을 문득 떠올렸다. 마키코를 울린 이후, 가즈키는 마키코의 이야기를 듣지 않기로 했다. 마키코의 이야기에는 출구가 없고, 단순히 월급 면에서 다그치는 것 같아서 화가나고 주눅이 들었다. 사람과 대화하고, 사람과 식사..

한밤의 도서관 2015.12.16

MOZU 스핀오프 ~부서진 과거~

MOZUスピンオフ『大杉探偵事務所~砕かれた過去編~』 (MOZU 스핀오프 오오스기 탐정사무소 ~부서진 과거~, 2015)편성정보 WOWOW 日 22:00 | 1부작, 2015.11.15 ~ 11.15 |출연 카가와 테루유키, 이토 아츠시, 스기사키 하나, 하야미 아카리, 우라이 켄지, 키리타니 켄타홈페이지 http://www.wowow.co.jp/drama/mozu_wowow/ohsugi_wowow 아름다운 표적 편이 한없이 가벼웠다면아 맞다, 모즈는 원래 진중 했었어 하고 돌려놓는 단편이었다. 무게감 쩐닼ㅋㅋㅋ 이게 모즈지. 공식 홈페이지에서 가져온 인물 관계도 니시지마 히데토시 오빠 안 나오나 기다렸는데한 3초 나오나 봄 ㅋㅋㅋㅋㅋㅋㅋ 하앜 멋져 +스핀오프가 굉장히 기분 전환?되면서 영화를 기대하게 만든..

먼지쌓인 필름 2015.12.13

가면산장 살인사건

“즉, 범인은 계획이 성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거예요. 도모미는 이미 약을 먹었지만 범행이 발각될 일은 없으니 다음 기회를 노리면 되는 거죠. 만일 범인이 노리는 바대로 죽어 주면 행운이고, 범인의 심리는 그렇지 않았을까요.” 사람들은 대부분 고통을 견뎌 가면서까지 무언가를 성취하려 하지 않는다. 힘든 상황에 처하면 우선 책임을 전가하고, 그다음에는 포기를 하든지 무기력해질 뿐이다. 그리고 비극의 주인공인 양한다. 당신네들은 하나같이 좋은 사람인 척하고 있지만 누군가 한 사람은 가면을 쓰고 있어. “아니죠, 아버님. 그건 몰상식하다거나 정숙하지 못하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에요. 인간이란 절실히 갖고 싶은 것을 위해서 때로는 미쳤다고밖에 할 수 없는 행동도 하는 법이죠.” “3억을 위해서는 사람..

한밤의 도서관 2015.12.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