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페이퍼프로 45

나는 절대로 저렇게 추하게 늙지 말아야지

“출근하기 전에 퇴근하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은, 내가 출근한 미래에서 퇴근하고 싶다는 감정이 과거로 거슬러 온 것 아닐까?” - 초광속 통신의 발명 中 나를 포함한 넷은 너무나 전형적이라서 오히려 비현실적인 내향적 사람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집구석에 틀어박혀 책을 읽거나 수학 문제 푸는 것을 선호하고, 그러다 보니까 근처 사람들한테 “얘는 하는 짓 보니 영재의 싹이 있다.”는 큰 오해를 받게 되고, 그 오해를 딱히 수정할 생각도 없어서 시키는 공부를 했는데 정말 머리가 좋지는 않아서 의대나 치대 진학은 실패하고, 약대나 갈까 생각하면서 화학공학이나 생물학 따위를 전공했는데 그게 생각보다 꽤 적성에 맞아서 어영부영 눌러앉았다가 결국 연구소에 계약직으로 흘러들어온 사람들이면서, 여전히 집에 틀어박혀 있는 ..

한밤의 도서관 2020.08.22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범죄소설 작가는 유쾌하지 못한 재주 탓에 작품마다 적어도 한 명은 욕을 얻어먹어도 싼 인물을 창조할 의무가 있으며, 이따금 착한 사람의 공간을 침범한 피비린내 나는 범죄행각을 불가피하게 그려야 할 때도 있다. 리밍이 코델리아의 기차표를 샀고 수하물 보관소에서 휴대용 타자기와 서류가방을 찾아오더니 일등석 열차를 향해 앞장서 걸었다. “나는 기차에서 할 일이 있어요. 혹시 읽을거리라도 있나요?” “괜찮아요. 저도 여행 중에 얘기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토머스 하디의 《트럼펫 주자》도 갖고 있고요. 가방에 늘 페이퍼백 한 권은 넣고 다니거든요.” 인간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존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왜 젊음을 질투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젊음은 특권의 문제가..

한밤의 도서관 2020.08.20

나의 비거니즘 만화

채식주의자의 범주 비건 (동물착취로 얻은 가죽, 화장품등도 소비하지 않는다.) 락토 (채식을 하나 달걀을 제외한 유제품까지는 허용.) 락토 오보 (채식을 하나 달걀과 유제품까지는 허용.) 페스코 (채식을 하나 생선, 달걀, 유제품까지는 허용.) 폴로 (‘붉은’ 살코기를 먹지 않는다.) 플렉시테리언 (채식을 지향하나 때에 따라 육류와 생선을 먹는다.) 프루테리언 (식물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 열매, 잎, 곡식 등만 먹는다.) 채식주의의 실천 범주는 정리한 것보다 아~주 넓고 다양해요. 저는 자신을 ‘어떤 채식주의자’라고 정하고 단어 안에 갇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건, 페스코 등의 명칭은 그저 무엇무엇을 소비하지 않는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소통하기 편리한 단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채식을..

한밤의 도서관 2020.08.02

그녀는 증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스스로 책을 고를 수 있는 나이가 된 후로. 헨은 늘 음산한 분위기의 책들을 골랐고, 죽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되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덕분에 고등학교 때 어둡고 징그러운 그림으로 몇몇 대회에서 상까지 탔으니까. 하지만 캠던 대학교 1학년 때 첫 조증이 오면서 과도한 자신감과 심각한 불안감 사이를 미친 듯이 오가게 되었다. 밤에 잠을 잘 수가 없어서 밤새 강박적으로 1시즌 DVD를 다시 봤다. 나중에 두 사람은 침대에 누워 책을 읽었다. 미라는 ⟪시간의 딸⟫을 읽기 시작했고, 매슈는 ⟪동떨어진 거울(A Distant Mirror)⟫를 거의 다 읽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이번이 세 번째로 읽는 것이리라 . 매슈는 역사물은 다 좋아했지만 특히 중세시대를 다룬 책이 제일 좋았다. ..

한밤의 도서관 2020.06.30

요리코를 위해

“하지만 당장 써야 할 소설 마감이 코앞이라고요.” “그런 건 개나 줘버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용을 써봐야 아무 소용 없어. 억지로 매수만 늘린다고 좋은 글이 나올 거 같냐?” “인간이란 종종 가까이 이웃한 누군가에게 모든 죄업을 뒤집어씌우곤 합니다. 때론 거기서부터 비극이 태어나죠. 니시무라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정으로 증오해야 할 적을 잃어버리고 손이 닿는 곳에서 증오의 표적을 정해버린 겁니다. 증오란 결코 이성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남의 괴로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절한 사람이라도 동정에는 한도가 있기 마련이라고. 니시무라가 내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말로 이해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이건 아니다. 근거 없는 상..

한밤의 도서관 2020.06.22

실버 로드

“죽음에는 어딘가 짜증나는 면이 있어요. 내면에서부터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참전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런 경고를 해주지 않았죠. 죽음을 직접 보면 어떻게 되는지, 죽음을 대면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죽음이 날 조종하고, 내 일부가 된다는 걸요.” “그걸 알았다면 참전 안 했을까요?” “제 경험상 잘 웃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더군요.” “무슨 말이죠?” “아무 이유 없이 웃고 미소로 상대를 속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악하더군요.” “명심하죠.” 과거를 떨쳐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쉬운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나 상대의 추악한 면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아. 불가피한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하지.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때를 놓..

한밤의 도서관 2020.06.15

미안하다고 말해

“저희 수사본부입니다. 어떻습니까, 교수님?” “독특한데요.” “일부러 가족 같은 분위기로 만들어봤습니다. 같이 마시고, 같이 먹고. 누구든 허심탄회하게 의견을 내놓을 수 있습니다. 실수가 있었다면 솔직히 고백하고, 의문 제기도 부담 없이 할 수 있죠. 저희 팀은 영국 최고의 사건 해결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당신들 어머니가 아주 자랑스러워하시겠군. 나는 생각한다. 경감의 건방진 태도가 무척 거슬린다. “성공한 사이코패스라는 이 개념은 의료계에서 자주 잊히거나 무시당합니다. 우리는 사회 주변부를 맴도는 이들만을 연구할 뿐입니다. 중퇴자와 성취도 낮은 사람들. 지적 능력과 야망이 부족한 사람들. 우리들 틈으로 완벽히 파고든 사이코패스들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건 불과 몇 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사..

한밤의 도서관 2020.05.25

아가미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보통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세상 모두를 용서할 수 있을 것 같지요? 안 그래요 곤은 자기가 한 말이 뜻하지 않게 그녀가 개인적으로 달래고 있을지 모를 환부를 성급히 일반화하거나 폄하하는 것으로 들렸을 법도 하겠다고 생각했지만 정정도 부연도 하지 않았다 이야기가 끝나면 책장을 덮는 것 외에 더 당연한 순서란 없었다. 더보기 아가미 (초판 2011) 리디북스에서 1,900원 대여한 책. 나님은 정신 차려라. 표지 디자인에 혹 하고 그러는 것 아니야. [파과]도 재밌게 읽은 것 ..

한밤의 도서관 2020.05.03

나를 쳐다보지 마

이처럼 상세한 편린(片鱗)들은 아동기의 기억 대부분이 멀리 사라진 후에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특히 어머니의 마지막 날은 내 마음에 철썩 들러붙어, 감은 눈꺼풀 속에서 일렁이며, 빛과 어둠으로, 마치 옛날 홈무비처럼 끊임없이 재상영된다. 나는 기다림을 싫어하지 않는다. 인내란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때를 보는 행위이다. 우리는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어른이 되기를 기다리고 늙기를 기다린다……. 어떤 날엔, 아니 대부분의 날에 나는 실망한 채로 귀가하지만 그렇다고 불행해하지는 않는다. 기회는 또 오기 마련이니까 “신문에 났더라. 글래스고의 어떤 나이 든 여자가 집 안에서 죽은 채로 8년간이나 방치돼 있었대. 찾아온 사람이 아무도 없었나 봐. 그래서 아무도 신고하지 않았고. 가스랑 전기는 끊겼어. 창문은..

한밤의 도서관 2020.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