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디페이퍼 20

우아한지 어떤지 모르는

결혼은 친척을 두 배로 늘리고, 짐을 두 배로 늘리고, 싸움을 네 배로 늘린다. 당연히 책꽂이의 책은 전부 이중으로 꽂혀 있다. 뒤에 있는 책은 보이지 않으니 분명히 있을 책이 걸핏하면 행방불명되는 바람에, 아내에게는 시침 뚝 떼고 똑같은 책을 또 샀다. 하지만 그런 나쁜 짓은 물론 들키게 돼 있다. 도대체가 책의 형태가 문제다. 네모나고, 쌓기 편하고, 게다가 썩지 않는다. 임시로 한 권을 책 탑 위에 대충 올려놓는다. 이게 그 뒤의 행방불명과 붕괴로 이어진다. 가나와 함께 살게 된 아버지는 아침 일찍 청소와 빨래를 시작해 오전 중으로 집을 구석구석 깨끗이 치우고 나면, 전철을 갈아타고 경로 우대 할인이 되는 영화를 보러 가거나 백화점 국숫집에서 점심을 먹거나(가나를 우연히 만난 국숫집을 처음 발견한 ..

한밤의 도서관 2020.03.26

고독한 늑대의 피

오가미와 히오카는 가코무라구미 사무소 주변에서 신도 방문을 하고 있었다. 경찰에서 말하는 ‘신도檀家’란 사건 관련 정보를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일반 시민을 가리킨다. 신도 방문과 통상적인 탐문의 차이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사건처럼 보이는 일이나 사건으로 연결될 만한 일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다는 점이다. 신도는 주유소 종업원, 현지의 개인 상점 주인, 커피숍 주인 등 다양하다. “폭력단은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아. 인간은 말이지, 밥을 먹으면 똥을 눠야 해. 밑을 닦을 휴지가 필요하다는 말이지. 그러니까 폭력단은 화장실 휴지 같은 거야.” “그런데 왜 나와시로들은 시체를 섬에 묻었을까요?” 눈앞에 나타난 아카마쓰 섬의 그림자를 응시하면서 오가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드럼통..

한밤의 도서관 2020.03.20

라이프 오어 데스

“자네 이름이 뭔가, 젊은이?” “모스 제러마이어 웹스터인데요.” “이름이 모스가 뭐야?” “그게요, 소장님, 엄마가 제 출생증명서에 모세를 잘못 쓰셔 가지고요.” 자라다 만 나무들의 행렬 위로 붉게 빛나는 태양이 떠오른다. 네 시간 후, 물의 기억은 까마득하고 하늘에서는 불타는 원이 용접공의 불꽃처럼 뒷목을 달구고 있다. 길 위에는 피부의 모든 주름과 패인 곳에 먼지를 뒤집어쓴 오디 혼자뿐이다. 면회시간이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여자들이 몇 명 있다. 남자들을, 또는 범죄자들을 잘못 고른 여자들이다. 잡힌 자들. 패자들. 서툰 자들. 사기꾼들. 데지레는 회상에 잠긴다. 데지레는 이미 좋은 남자를 찾는 건 쉽지 않다고, 제일 좋은 남자는 보통 게이 아니면 유부남이거나 허구의 인물이라고 결론을 내려버렸다. 2..

한밤의 도서관 2020.03.12

빙산이 녹고 있다고?

누구에게나 위기는 닥칠 수 있다. 그리고 어느 조직이나 붕괴될 수 있다. 다만 그것을 알아채지 못하고 현재에 안주하여 변화를 꾀하지 않는다면, 예정된 시점보다 더 빨리 무너져버리고 말 것이다. 조직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구성원에게 비전을 제시하고 전략을 수립하여 일정한 방향으로 이끌어가는 리더가 필요하다. 또한 뛰어난 문제해결력과 창의력으로 끊임없이 아이디어를 제시하는 아이디어맨도 필요하다. 더불어 경영진과 팀원을 연결하여 조화와 협력을 이끌어내고, 개성이 다양한 구성원들이 인간적인 신뢰를 기반으로 강력한 팀워크를 구축할 수 있도록 돕는 중간관리자도 있어야 한다. 지금 직면하고 있거나, 장차 닥쳐올 심각한 위기는 눈앞에 보이지 않는다. 미온적인 변화가 지속되면 결국 겉잡을 수 없는 위기..

한밤의 도서관 2019.11.07

언제나 여행 중

개성을 만드는 요소란 자란 환경이나 경험이나 유전뿐 아니라 그 시대, 그 장소의 공기이기도 하다. 국경을 지나기 전의 하늘은 분명 핀란드 직원의 미소 띤 얼굴을 닮은 흐린 하늘이었는데, 국경을 지난 뒤의 하늘은 여지없이 러시아 직원처럼 거만하게 흐린 하늘이었다. - 아무래도 모르겠는, 그런 도시___러시아 나고 자란 나라에서 변화를 느끼기는 정말 어렵다. 물론 컴퓨터 보급이나 휴대전화의 등장으로 소통 방식이 달라졌다는 것 등은 체감할 수 있지만, 그건 변화가 아니라 단지 신제품이 등장한 것뿐이다. 1970년대 이후로는 어떤 세계관 같은 것이 크게 변하는, 온몸이 뒤흔들리는 일은 더 이상 있을 수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연히 여행하다가 반해버린 곳에서 생생한 변화를 목격하는 건 정말 행복..

한밤의 도서관 2019.10.29

나오미와 가나코

나오미가 경험한 일 중에서 제일 놀라웠던 것은 시내에서 운전하다가 추돌 사고를 일으킨 사장 부인이 패닉 상태에 빠져 외판부에 도움을 요청한 일이었다. 이때는 담당자인 나이토가 경찰보다 먼저 현장으로 달려가 사고 처리를 하고 피해자와 담판을 벌였다. 감격한 사장 부인은 그 후 나이토로부터 1천만 엔 가까운 보석과 명품을 구입했다. 충성, 신뢰 관계,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 이것이 백화점 외판부의 순환 구조였다. “내 생각인데 남자는 마음 어딘가에 마누라를 심부름꾼처럼 여기는 구석이 있어요. 자신의 기저귀를 갈게 하다니 사랑하는 사람에게 부탁할 일은 아니잖아요. 다른 사람 기분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아니, 그 이전에 일하고 있을 때라면 몰라도 정년퇴직한 후에도 집안일을 전부 마누라한테 맡기면 어쩌..

한밤의 도서관 2019.06.13

미 비포유

하지만 이걸로 당신은 자유를 살 수 있을 겁니다. 우리 둘 다 고향이라고 부르는 그 폐소공포증을 유발하는 좁은 마을과, 지금까지 당신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했던 선택들로부터 해방될 자유 말입니다. Me Before You 예전에 직장 동료가 읽을만하다 추천해줬던 기억이 있는데, 독서 편식 심할 때라(추리 소설만 읽음) 거들떠도 안보다 리디북스 700원 대여(60일) 찬스로 빌려놓고서! 방치하다 대여 기간 일주일 남았길래 부랴부랴 읽었다. 안락사에 대한 내용. + 감정이 메마른 나란 사람은 기승전결 다 보여서 그냥 묵묵히 읽음. 근데 거의 600페이지..... 허들 높다 높아.... ++ 이 책이 작가의 데뷔작인지 아닌지 몰라 인터넷 서점이랑 구글 검색을 몇 번 해봤는데 정확하게 안 나오네? 근데 [트위..

한밤의 도서관 2019.05.14

짐승의 성

자신이 피해자가 되는 건 당연히 무섭지만, 가해자가 되는 것도 똑같이 무서운 일이다. 자기 안에도 범죄의 싹이 있을 수 있다. 지금은 괜찮더라도 언제 자신도 범죄자가 될지 모른다. 그래서 알고 싶은 것이 아닐까. 자신과 범죄자는 뭐가 다른가. 범죄자가 되는 사람과 되지 않는 사람과의 경계선은 어디에 있는가. 가장 무서운 일은 그 경계선이 없는 것이다. 분명 사람은 익숙해진다. 즐거운 일에도, 괴로운 일에도, 상냥함에도, 미움에도. 남에게 상처 주는 일에도. 특별수사본부는 최근 팩 형태의 보냉제를 대량 구입해 경찰서 냉장고에서 얼린 뒤 외근 나가는 수사원들에게 세 개씩 나눠주고 있다. 수사원들은 보냉제를 손수건에 싸서 옷의 적당한 곳에 넣어 체온을 조절한다. 하지만 기껏해야 두 시간 정도밖에 유지되지 않는..

한밤의 도서관 2019.05.05

기분 벗고 주무시죠

가끔 우리는 이 리액션을 본질이라고 착각할 때도 있어요. 화가 나서 더 화가 나고, 슬퍼서 울다 보니 더 서글퍼지는 식으로 말이죠. 감정은 충분히 표출하는 게 건강에 좋지만, 이렇게 기분 속에 갇히면 표출이 아니라 발버둥을 치게 됩니다. 힘은 점점 빠지고 감정 속으로 더 깊이 빠져들고 말죠. 이제 와 곰곰이 생각해보건대, ‘혼자만의 시간’이라는 건 ‘타인을 만나지 않는’ 시간이 아닌 것 같아요. 방구석에 혼자 있어도 끊임없이 에너지를 쓰고 불안에 시달릴 수도 있거든요. SNS와 누군가의 카톡 하나, 애인의 말 한마디에 하루 종일 벌벌 떨며 불편한 하루를 보낼 수도 있어요. 이런 경우라면 백날 천날 혼자 있어도 에너지가 충전되기는커녕 끊임없이 나락으로 떨어지기만 할 뿐이죠. 혼자만의 시간이란 건 물리적으로..

한밤의 도서관 2019.04.01

메리 수를 죽이고

어쩌면 성장이란 시간의 흐름이 가져오는 필연일지도 모른다. -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中 지진과 쓰나미의 영향으로 노심이 융해된 후쿠시마의 원자력발전소에서 다량의 방사성 물질이 쏟아져 나왔다. 눈에도 보이지 않고, 인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한 채로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왔다. 막연하고 어렴풋한 불안을 끌어안은 채로, 뭐 괜찮겠지, 하고 암시를 걸며 공기를 마시고 있었다. “경계란 항상 모호해요. 각자 자기만의 현실 인식에 따라 믿는 것을 스스로 정의해갈 수밖에 없죠.” - 트랜스시버 中 “전자서적 시대에도 소설 퇴고는 종이로 하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편이 머리에 잘 들어오거든. 텍스트 데이터로만 된 소설이라니 육체가 없는 인간하고 비슷하지 않아? 그건 작..

한밤의 도서관 2019.03.21

남편의 그것이 들어가지 않아

만약 오늘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괴로운 하루가 된다면 내일 아침 여기를 넘으면 된다. 그러니 오늘만 힘내보자. 오늘 하루만. 죽는 것은 언제라도 할 수 있으니까. 분위기에 휩쓸려 그대로 훌쩍 선을 넘어버리지 않도록 다시금 핸들을 꽉 잡는다. 그 고지대를 만일에 대비한 부적처럼 여기며 정신을 바짝 차리고 학교로 향한다. 부모님도 여동생도 동급생도 예전에 함께 일한 사람도, 나를 보면 “요즘 뭐 하고 지내”라고 묻는다. 그 질문에 악의가 없다는 사실은 안다. 정말 순수하게 무엇을 하는지 묻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안 해”라고 대답한다. 정말이다. 그러면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 그럼, 오늘 낮에 집에서 뭐 했어”라고 다시 묻는다. 시간을 좁혀본들 역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가만히 있었어..

한밤의 도서관 2019.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