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소설 6

실버 로드

“죽음에는 어딘가 짜증나는 면이 있어요. 내면에서부터 사람을 망가뜨립니다. 참전하기 전에는 아무도 그런 경고를 해주지 않았죠. 죽음을 직접 보면 어떻게 되는지, 죽음을 대면하고 나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어요. 죽음이 날 조종하고, 내 일부가 된다는 걸요.” “그걸 알았다면 참전 안 했을까요?” “제 경험상 잘 웃는 사람을 조심해야 하더군요.” “무슨 말이죠?” “아무 이유 없이 웃고 미소로 상대를 속이는 사람들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사악하더군요.” “명심하죠.” 과거를 떨쳐내고 아무 일도 없었던 척하는 게,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게 쉬운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세상이나 상대의 추악한 면을 믿고 싶어 하지 않아. 불가피한 상황을 회피하고 싶어 하지. 모래에 머리를 파묻고 있다가 때를 놓..

한밤의 도서관 2020.06.15

늑대의 왕

조수들이 다시 나와 사형수를 묶었다. 회스가 손에 침을 뱉고 도끼를 치켜들었다가 그대로 사형수의 손목에 내리찍자 쩍 소리를 내며 손목이 댕강 잘렸다. 사형수가 고통으로 울부짖는 가운데 조수가 진흙탕에 나뒹구는 손을 집어 들더니 군중을 향해 던져주었다. 참수당한 자의 손가락과 손을 가지고 있으면 행운이 온다는 속설이 있었다. 특히 엄지손가락은 도둑이 가지고 있으면 잡히지 않는다고 해서 인기가 많았는데 이 도시에는 도둑이 수도 없이 많았고 다들 미신을 믿었다. 손을 서로 갖겠다고 씨름하던 부랑아들 중 이긴 자가 이 손을 가져가서 토막내어 팔게 될 터였다. "아마 죽음은 사람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찾아오나 봅니다. 제가 마주한 죽음은 검은 아가리를 벌린 텅 빈 심연이었습니다. 죽음이 저를 삼키는 순간, 저는 ..

한밤의 도서관 2020.06.04

여름의 책

"사랑은 참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사랑은 줄수록 돌려받지 못해." "정말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럼 어떻게 하지?" "계속 사랑해야지." 소피아가 위협하듯이 말했다. "더욱더 많이 사랑해야지." "난 좀 이상해." 소피아가 말했다. "날이 좋으면 짜증이 나는 거 같아." "그래?" 할머니가 말했다. "그건 네 할아버지하고 똑같구나. 할아버지도 폭풍을 좋아했지." 하지만 소피아는 할머니가 말을 더 하기도 전에 가 버렸다. 여름이 깊어 밤이 꽤 길어진 지 오래여서, 잠에서 깬 소피아는 어둠 외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새 한 마리가 협곡 위를 날아가며 먼저 가까운 곳에서, 이어서 멀리서 울었다. 평화로운 밤이었고, 바다 소리가 들렸다. 협곡을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지만, 마치 무언가 움직이..

한밤의 도서관 2020.04.10

유리병 편지

외로움이 온몸을 짓눌러 올 때가 있다. 모든 인간이 그런 때를 만난다. 그러면 우리는 자신이 왜 이토록 외로운지 묻는다. 하지만 고독과 고독에 대한 의문은 별개다. 성 동정녀 교회 신도들은 가능한 한 병원을 가지 않는 사람들이다. 성모가 자신들을 지켜 주신다고 믿기 때문이다. 사티야 사이바바, 사이언톨로지, 성 동정녀 교회, 여호와의 증인, 하느님의 자녀들, 영원의 공동체 같은 이름들이 있었고 통일교, 제의 진리, 성스러운 빛의 사명처럼 그녀로서는 처음 들어 보는 다른 이름들도 가득했다. 각 단체와 조직마다 지켜야 할 계율들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들 자기 단체만이 조화와 사랑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교단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는 아무도 웃지 않았다. 그에겐 즐거움이라는 것이 없었다. 마지막으..

한밤의 도서관 2019.07.11

부스러기들

토라가 요리보다 귀찮게 여기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이 주제에 있어서 그녀는 지난 몇 년 사이 부쩍 음식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대부분의 친구 부부들과 성향이 갈렸다. 심지어 한 친구는 토라와 토라의 남자친구 매튜를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로 요리교실 수강증을 끊어주고는 본인의 결정에 아주 만족스러워 했다. 토라와 매튜는 ‘중동의 마법’이라는 이름의 요리교실에 의무감으로 참석했지만, 강사는 두 사람에게 요리의 즐거움이라는 마법까지 전파해주지는 못했다. 토라는 어째서 지금까지 아름답고 젊은 여자와 돈 한 푼 없는 늙은 남자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지 신기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게 토라와 무슨 상관이겠는가?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것에 끌리기 마련이고, 의도가 무..

한밤의 도서관 2017.10.02

로재나

“사색에 빠지지마. 그러면 사기가 꺾여.” “사기가 꺽여?” “그래, 생각해 봐. 시간이 넘치는 사람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것들을 잔뜩 몽상해내는지. 지나친 사색은 비능률의 어머니야.” 미스테리아 매거진에서 보고 체크해 두었던 책. 북유럽 소설은 이름이 너무 어려워 힘든데, 이 책은 이름이 하나도 안 헷갈림! (책이 얇아서 안 쉬고 읽어서 그런 것 같음. ㅋㅋㅋ) 최고였다 핸드폰 없는 옛날 배경인 거 빼고, 배를 타고 여행했던 사람이 죽어버린 거라, 배에 탔던 모든 사람들이 범인 후보다. 라고 시작하는 것부터 지림. 게다가 국적도 여러 군데얔ㅋㅋㅋㅋ 국내 최초 출간이라서, 포장도 되어있고, 엽서랑 메모지도 줬다. 다른 시리즈도 기대된다.

한밤의 도서관 2017.08.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