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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

범죄소설 작가는 유쾌하지 못한 재주 탓에 작품마다 적어도 한 명은 욕을 얻어먹어도 싼 인물을 창조할 의무가 있으며, 이따금 착한 사람의 공간을 침범한 피비린내 나는 범죄행각을 불가피하게 그려야 할 때도 있다. 리밍이 코델리아의 기차표를 샀고 수하물 보관소에서 휴대용 타자기와 서류가방을 찾아오더니 일등석 열차를 향해 앞장서 걸었다. “나는 기차에서 할 일이 있어요. 혹시 읽을거리라도 있나요?” “괜찮아요. 저도 여행 중에 얘기 나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토머스 하디의 《트럼펫 주자》도 갖고 있고요. 가방에 늘 페이퍼백 한 권은 넣고 다니거든요.” 인간이란 얼마나 변덕스러우면서도 흥미로운 존재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들이 왜 젊음을 질투해야 하는지 도무지 모르겠거든요. 젊음은 특권의 문제가..

한밤의 도서관 2020.08.20

이파브르의 탐구생활

귀농을 시작했을 때, 당연히 마당이 딸린 단층 시골집에 살 거라 상상했다. 시골에 빈집이 점점 늘고 있다는 기사를 접하며 저 가운데 한 곳에 살 수 있겠지 기대했다. 하지만 서울이나 시골이나 집이 문제였다. 모든 물건은 쓰다 보면 세월의 흔적이 남는다. 구멍이 나거나 바래거나 닳거나 깨지거나 금이 간다. 그것들을 수리해서 이어 쓴다면, 새로이 만드는 기술을 어렵사리 익히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건 힘들지만, 유의 생명을 연장시키는 건 보다 가볍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요새는 ‘되살리는 기술’에 더 큰 관심이 생겼다. “잡곡이라고 하지 말고 밭곡이라고 해. 우리 어머니는 옛날부터 그렇게 불렀거든!” 수수, 조, 보리 등을 싸잡아 이르는 잡곡이라는 말은 일제 강점기 때..

한밤의 도서관 2020.08.19

생애최초주택구입 표류기

한 가지 깨달은 점은 무엇이든 이사 전에 미리 사두면 후회한다는 것이었다. 이사를 할 때까지 시간이 많으면 그만큼 생각도 많아진다. 필요할 것 같은 물건들이 새 집의 구조와 맞지 않거나 필요 없어지는 일이 생긴다. 내게 있어 진정한 ‘내 집’이란 극단적으로 말해서 ‘고독사’가 가능한 집이다. 전기도 끊기고 수도가 끊기더라도 나만 아무렇지 않으면 살 수 있는 집. 그 공간에 웅크리고 살다가 누구도 모르게 죽을 수 있는 집. 누군가가 찾아와 관리비를 내라고 독촉하지도 않고, 반상회에 나오라고 안내문을 전하지도 않는 집. 길에는 수많은 전단지가 있다. 그중에서 가장 많은 것 중 하나가 ‘신축 빌라’ 분양을 알리는 전단지다. 그것들이 보여주는 빌라들은 하나같이 모두 놀랍다. 역세권에 위치해 있으며 ‘왕 테라스’..

한밤의 도서관 2020.08.18

옥상에서 만나요

“언니, 결혼생활은 어때요?” “굴욕적이야.” “가장 행복한 순간에도 기본적으로 잔잔하게 굴욕적이야. 내 시간, 내 에너지, 내 결정을 아무도 존중해주지 않아. 인생의 소유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 넘어간 기분이야.” 어릴 때부터 성실했던 서른네번째 여자는, 결혼 적령기에 곁에 있던 사람과 쫓기는 마음으로 결혼했다. 몇 년이 지나고서야 이 숙제는 사실 하지 않아도 되는 숙제가 아니었을까, 의문이 찾아왔다. 다섯살 아래 여동생과 통화하다가 여자는 그런 이야기들을 했다. “스무살 넘으면 어른인데 너무 아이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것 같아. 입을 모아 내가 부족한 존재라 해서 정말 부족한 줄 알았어. 결혼을 해야 어른 취급받는 건 너무 이상하지 않니? 그래서 착각한 게 아닐까, 꼭 해야하는 숙제로. 너는 나..

한밤의 도서관 2020.08.14

놀고, 즐기면서, 돈도 버는 취미야 고마워

혹시 ‘하비프러너’라는 단어 아세요? ‘호큐페이션’은요? 하비프러너Hobby-preneur는 최근 상업시장의 글로벌 트렌드입니다. 취미를 발전시킨 창업이라는 뜻이지요. 호큐페이션Hocupation은 취미Hobby와 직업Occupation을 결합한 새로운 말이고요. 시작이 중요하다.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실제로 첫발을 내딛는 사람은 소수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왜 알면서도 망설일까? 구구절절 수많은 이유가 있다. 시간이 부족하다, 이 나이에 이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생각이 끊임없이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는다. 사실 이러한 변명들은 한 가지로 귀결된다. 바로 ‘두려움’이다. 다른사람들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실패했을 때 치러야 할 대가에 대한 두..

한밤의 도서관 2020.08.10

Tokri

Tokri The Basket, 바구니 소녀 (2017) 감독: 수레시 에리야트 더보기 스톱 모션 사랑해요! 인도의 풍경을 볼 수 있는 단편 애니메이션 ‘Tokri’는 우리말 ‘소쿠리’ 또는 ‘광주리’와 같은 의미. 인도의 광고 영상 스튜디오 ‘Eeksaurus’가 8년에 걸쳐 제작한 애니메이션은 뭄바이의 어려운 가정에서 서로를 위로하며 함께 살아가는 아버지와 딸의 애틋한 관계를 그렸다. 감독 Suresh Eriyat은 뭄바이 시내를 운전하다가 신호등 앞에서 Tokri를 팔던 소녀의 간청을 거절했던 일을 깊이 후회하면서 이 애니메이션을 기획하게 되었다고... - https://www.indiepost.co.kr/post/14050 발췌 - + 학교에서 돌아와 소쿠리를 만드는 소녀. 집으로 돌아오는 아빠의..

먼지쌓인 필름 2020.08.09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결혼할 남자한테 아기 기저귀를 갈아줄 생각이 있느냐고 물어보라 이 말이죠. 뭐라고 대답하는지 들어보면, 그 사람이 당신을 동등하게 대할 사람인지 종 부리듯 부려먹을 사람인지 알 수 있을 테니까요.” “왜 저렇게 여왕벌을 만지는 거예요?” “저 벌들은 여왕벌에게 나는 특별한 향기를 모아서 다른 벌들에게 나눠주고 있는 거야.” 할아버지가 대답했다. “저렇게 하면서 어느 벌집이 자기 집인지 알게 되지. 여왕벌마다 자기만의 향기를 가지고 있거든. 여왕벌의 딸 벌들은 그 냄새를 절대 잊지 않는단다.” 엄마들에게 저마다 특유한 향기가 난다는 건 사실이다. 우리 엄마에게서는 교회 중고 옷 가게에서 산, 다른 사람들의 옷에 밴 희미한 머스크 향에 엄마의 찰리 향수와 밴티지Vantage 담배 냄새가 섞인 향이 났다. ..

한밤의 도서관 2020.08.06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BEASTS CLAWING AT STRAWS (2020) 감독: 김용훈 원작: 소네 케이스케 출연: 전도연, 정우성, 배성우, 윤여정, 신현빈, 정만식, 진경, 정가람, 김준한 더보기 제작 소식 들었을 때 나의 솔직한 마음은 나만 알고 싶은 최애 작가님의 소설을 망치지 마라..... 였는데 드디어 보게 됐네. 사실 영화 보는 내내 원작 읽은 지 오래돼서 정확히 기억은 안 났지만 생각보다 꽤 인물들 연결이 잘 되어있었고 전도연이 살리고 전도연이 빛나는 영화여서 만족하면서 봤다. 똑같은 문신을 새기는 순간 원작 소설이 생각남. 배성우 억울 연기 찰떡 나 울 뻔 죄송합니다 딸 대학 등록금 때무네ㅋㅋㅋㅋㅋㅋㅋ(엉엉엉) 굳이 이 역할을 정우성이 해야만 했나? 싶을 정도로 붕 떠있었음..

먼지쌓인 필름 2020.08.03

孤狼の血

그런 외줄타기를 언제까지 할 겁니까? 줄에 올라탔으면 끝이야 야쿠자든 경찰이든 한 쪽으로 기울어지면 추락하는 거지 孤狼の血 The Blood of Wolves, 고독한 늑대의 피 (2018) 감독: 시라이시 카즈야 원작: 유즈키 유코 출연: 야쿠쇼 코지, 마츠자카 토리, 마키 요코, 타키토 켄이치, 이시바시 렌지, 에구치 요스케, 피에르 타키 더보기 이야...... 소설을 이렇게 망쳐놨다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성작가가 탄탄하게 만들어놓은 작품이 쓰레기가 됐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평점 누가줬냐 딱 봐도 자극적인 장면 좋아하는 어린이들이 평점 남긴 듯 소설대로만 하지 그랬어!!!!!!!!!!!!!!!!!!!!!! (오열) 원작 읽은 나는 너무 슬퍼지는데 그리고..

먼지쌓인 필름 2020.08.02

나의 비거니즘 만화

채식주의자의 범주 비건 (동물착취로 얻은 가죽, 화장품등도 소비하지 않는다.) 락토 (채식을 하나 달걀을 제외한 유제품까지는 허용.) 락토 오보 (채식을 하나 달걀과 유제품까지는 허용.) 페스코 (채식을 하나 생선, 달걀, 유제품까지는 허용.) 폴로 (‘붉은’ 살코기를 먹지 않는다.) 플렉시테리언 (채식을 지향하나 때에 따라 육류와 생선을 먹는다.) 프루테리언 (식물의 생존을 방해하지 않는 열매, 잎, 곡식 등만 먹는다.) 채식주의의 실천 범주는 정리한 것보다 아~주 넓고 다양해요. 저는 자신을 ‘어떤 채식주의자’라고 정하고 단어 안에 갇히는 게 좋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비건, 페스코 등의 명칭은 그저 무엇무엇을 소비하지 않는다고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소통하기 편리한 단어라고 생각해요. 중요한 건 채식을..

한밤의 도서관 2020.08.02

일의 기쁨과 슬픔

연애 기간 동안, 우리는 서로의 연봉을 모르고 있었다. 여느 회사가 그렇듯 우리 회사도 자신의 연봉을 누설하면 해고할 수 있다는 사규가 있었다. 하지만 결혼을 준비하면서 어쩔 수 없이 서로가 모아둔 재산과 연봉을 공개해야 했다. “하나, 둘, 셋 하면 동시에 말하는 거야.”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가족오락관 찍는 것 같다는 농담을 하면서 웃고 있었다. 셋, 하던 그 순간, 나는 구재와 내가 외치는 숫자의 앞자리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보다 세전 기준 천삼십만원을 더 받는 구재는 당연히, 모아놓은 돈도 나보다 훨씬 많았다. 구재 역시 당황한 눈치였다. 생각보다 큰 차이가 나자 자기도 민망했는지 이렇게 말했었다. “네가 이년 동안 백오피스에 있어서 그랬나봐.“ 그래, 그게 맞는다고 치자. 그러면 나는..

한밤의 도서관 2020.07.30

Jean Paul Gaultier: Freak and Chic

저는 사랑받으려고 이 일을 합니다. 결국 즐기는 게 핵심입니다. Jean Paul Gaultier: Freak and Chic 장 폴 고티에: 프릭 앤 시크 (2019) 감독: 얀 레노레트 출연: 장 폴 고티에 더보기 볼 거 없을 땐(?) 다큐멘터리지 ㅋㅋㅋㅋ 영화 내용 자신의 인생을 주제로 한 쇼를 제작하는 동안, 고티에는 어린 시절에 당한 괴롭힘과 동성애자로서의 고민, 학창 시절 친구, 할머니, 세상을 떠난 연인, 마돈나와의 첫 협업 등을 회고한다. 남자아이는 인형 가지고 노는 거 아니라고 아이고 이 놈의 고정관념 의상 진짜 엄청나게 독특하다 재봉하시는 분 천재 아니냐고 이런 걸 어떻게 만들어! ㄷ ㄷ ㄷ 아니, 중간중간 영문 타이틀마다 한국어 제목을 그래픽 효과까지 똑같이 만들어 같이 녹인 영화 또..

먼지쌓인 필름 2020.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