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쿠라기시노 9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해를 거듭할수록 생일이 서글퍼진다. 나이 듦에 따른 외로움이 아니라 당장 눈앞의 미래가 보이지 않는, 자신의 양어깨를 덮쳐누르는 뚜렷한 불안 때문이었다. -가족 여행 스승의 말에 따르면 결말을 아는 영화를 즐길 수 있으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이며, 아는 결말을 한 달간 즐길 수 있는 직업이 바로 영사기사라고 한다. -영화 팬 오우라와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짧은 야간 아르바이트에는 휴식 시간이 없기 때문에 반년 전에 들어온 접수 담당 여직원이 기혼인지 미혼인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과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홀가분함이 이곳에서 계속 근무할 수 있는 큰 이유이지만, 희박한 인간관계 속에 가끔 이런 대화가 오가면 묘하게 반가운 것도 솔직한 심정이다. -미안, 좋아해 청경채와 달걀볶음에 참기름을..

한밤의 도서관 2021.03.10

별이 총총

처음 먹은 맛이 그리워질 정도가 되면 그때는 손을 내밀기도 귀찮아진다. 아무리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싫증이 난다는 것을 서서히 알게 된다. 사랑도 유효 기한이 있는 것이고, 그리 오래 이어지는 게 아니다. 기간 한정. -나 홀로 왈츠 中 외둥이는 좋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일수록 아이가 주렁주렁 많았다. 아이가 셋이면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다나 뭐라나, 아주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말하곤 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기를 바라는 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그도 저도 시간이 지나 한바탕 상처를 입은 뒤에야 깨달은 일이었다. 둘씩 셋씩 낳아봤자 하나라도 비뚤어져서 말썽을 부리면 그걸로 모든 게 끝장이다. 자식 농사에 2승 1패 같은 건 없지 않은가. 하나라도 똑똑하고 반듯하게 키워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바닷가의..

한밤의 도서관 2019.08.16

빙평선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개미처럼 좀스럽게 살다 보면 마음까지 대자연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베어낸 목초와 똑같이 서서히 발효해 양분도 불어나고 이윽고는 퇴비가 된다. 다쓰로는 몸의 깊은 안쪽부터 썩어서 흙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파산 면책을 받은 시점에 함께 상실해 버린 뭔가가 있었다. - 설충 中 “나는 사랑과 일 중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는 둘 다 내버리고 싶어져. 그래서 항상 양쪽 다 확실하게 손에 넣을 방법만 생각하려고 해.” 결혼과 이혼을 거쳐 마흔을 코앞에 두고 보니, 힘겨울 때 혼자서 뚫고 나가겠다는 각오만 단단히 해두면 의외로 힘든 일 따위 찾아오지 않는 법이라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액운도 재..

한밤의 도서관 2018.06.12

유리 갈대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는 말을 처음 들었고, 이만큼 구체적으로 조건을 제시하니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 마음 흔들릴 일도 없겠다고 생각했다. 사랑이니 뭐니 운운하지 않는 만큼 결혼생활은 담담했다. 테이블 너머에서 웃는 입술이 좌우 똑같이 올라갔다. 아무리 감추어도 입가에는 마음이 드러난다. 눈꼬리를 향해 정직하게 올라간 입꼬리는 사와키의 이목구비를 한층 더 매력적으로 보이게 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르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보다 한번 무덤에 묻는 편이 서로를 위한거야. 당신은 앞으로도 살아갈 테고.” 한 권으로 정리하는 일에 대해 기이치로는 ‘묻는다’라느 표현을 쓰고, 다시 고칠 수 없는 곳까지 가지 않으면 새로운 것도 태어나지 않는다고 했다. “바다, 좋아했던가.” “좋다, 싫다 생각한..

한밤의 도서관 2016.10.21

굽이치는 달

“팀장님…….”지하로 내려가는 층계참, 맨살을 드러낸 콘크리트가 유난히 차가웠다.“그러고도 월급 받는 거, 고마운 줄이나 알아. 죄다 지들 멋대로 불평이나 하고.”수고했어.이치코 팀장은 마지막에 그렇게 내뱉고 계단을 올라갔다. 그녀가 있던 자리에는 2차 나갈 때 뿌리는 오드투알레트 향수 냄새가 떠돌았다. 이런 것이 전무가 말하는 성인 사회라면 기요미는 자신이 있을 자리는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로 어중간한 자리에 한숨만 쌓여가고있었다.아, 싫다. 혹시 이사무의 아이가 생기더라도 자신은 낳지 않을 것이다.그런 임신은 단순한 ‘실수’일 뿐이다. 내 인생을 바쳐야 할 것은 어딘가 다른 곳에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없는 것보다 나은 남자’에게 온몸을 던져 의지할 수는 없다. 쓰레기통 속..

한밤의 도서관 2015.07.18

유리 갈대

원해도 얻지 못할 자여펼친 손으로 어둠을 잡아라 시작은 활짝 열린 해질 녘누구의 것도 될 수 없는 이 곳 손 더듬으로 사랑에 살고 죽는 자여하늘을 보고 어둠을 듣거라 엇갈리는 그저 그것 뿐인 이 세상에아직 만나지 못한 겨울 매미들 습한 곳에 꿋꿋이 서있는 유리 갈대에얼빠진 모래만 졸졸 흐른다 硝子の葦 ~garasu no ashi~ (유리갈대, 2015) 편성정보 WOWOW 土 22:00 | 5부작, 2015.02.21 ~ 03.14 | 출연 아이부 사키, 오자와 유키요시, 오쿠다 에이지, 타키가와 유미, 나카무라 유리, 모리카와 아오이, 와타나베 코노미, 코바야시 카츠야, 치바 테츠야, 키노 하나 홈페이지 http://www.wowow.co.jp/dramaw/garasunoashi/ WOWOW에서 하는 ..

먼지쌓인 필름 2015.05.25

호텔 로열

좌절, 패배자. 희망, 꿈.대화할 때마다 툭툭 튀어나오는 그런 단어들은 지금까지 미유키가 그려온 미래―그저 무난한 일생을 보낼 수만 있어도 감지덕지라는―의 가느다란 심지를 뒤흔들었다. 드라마틱한 한때를 가진 남자 곁에만 있어도 그녀 자신까지 그 드라마의 일부가 되는 것 같았다. 다카시가 말하는 ‘꿈과 희망’은 폐허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먼지를 꼭 닮은 것이었다. 잠시 피어올랐다가 다시 원래 자리에 내려앉는다. 여기에서 탈출하는 일도 없고, 닦아낼 만한 계기도 찾아오지 않는다.-셔터 찬스 中 미키코의 마음속에 고여 있던 물이 그때까지 일정했던 수위를 잃고 일렁거리기 시작했다. 문득 사이교의 자비심 깊은 눈빛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좌우로 흔들리다가 한 바퀴 빙글 도는 눈. 미키코도 함께 빙글 돌았다.-금일 개..

한밤의 도서관 2015.03.04

순수의 영역

레이코는 각자 할 수 있는 일을 하자고 제안했다. 불만은 없다. 수입에 대해서는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라, 라는 아내의 말을 빌미로, 쌓이는 부채감을 애써 외면하고 있다. 깊은 내면에는 고마움을 감싼 엷은 질투심이 존재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한번 미끄러지기 시작하면 멈추기 힘든 내면의 모래언덕이다. 갇힌 세계에서 가끔 아무 이유 없이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나쁜 버릇이란 건 안다. 애써 얻어 소중히 품어온 것을 무작정 버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대외적인 얼굴과 내면에 지닌 모습에 괴리감이 있는 남자였다. ‘괴리’라는 말을 레이코는 속으로 되뇌어본다. 겉과 속이 같은 사람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하느냐고 스스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곁에 잠들어있는 남편을 생각한다. 모든 일에 대해 내가 선택하고 책임도..

한밤의 도서관 2015.02.07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

“말을 안 하면 당신을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아빠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말을 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은 알 수가 없어집니다. 말을 안 해도 당신과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몇 번 말할까 생각했습니다. 조금 힘들었어요. 하지만 당신의 혼잣말을 정말 좋아합니다. 영원히 듣고 싶었는데.”-파도에 꽃피우다 中 “넌 말이지, 정말로 영혼이 고독해. 사람들한테 네 자신을 드러내지 않아.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모두 네 자신 속에서만 담아놓고 다른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한다거나 다른 사람이 네 마음을 알아줬으면 하는 생각도 전혀 없지. 말도 어눌하고 머리도 모자라. 사람이란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지. 언젠가 누군가가 나타나서 너를 구해줄 거라는 환상 따윈 빨리 버리라고. 만약 ..

한밤의 도서관 2015.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