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35

애니 앳킨스 컬렉션

나는 소품 담당자 로빈 밀러의 책장에서 《캐스트 어웨이》의 윌슨(배구공)을 만난 적이 있다. 나 역시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에 사용된 멘들스 박스 두어 개를 내 작업실에 자랑스럽게 진열해 놓았다. 하지만 세트 데코레이터가 진정한 수집가라서 이런 물건을 몇 서랍씩 보관하지 않는 한, 그래픽 소품 대부분은 보관되지 않는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종이는 특히 고생이 많다. 뜨거운 조명과 배우들의 땀에 젖은 손 때문에 금세 손상 된다. 'MENDL'S'라는 단어는 일러스트레이터가 담당했고, 나머지 레터링과 가느다란 줄 세공은 내가 직접 나섰다. 그런데 철자 확인 과정을 세심하게 거치지 않은 바람에 촬영 중반이 되어서야 내가 실수로 'pâtisserie'(파티스리, 제과점이라는 뜻)라는 단어에 't'를 한 번 ..

한밤의 도서관 2020.06.06

북디자인 101

책을 디자인하는 과정에는 두 가지 출발점이 존재한다. 하나는 책의 내부, 즉 본문부터 시작하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책의 외부, 즉 바깥쪽 커버와 제본방식을 고려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방법이다. 북디자인에 관한 책임은 디자이너나 제작자, 인쇄 전문가 또는 서적 제작에 관련된 다른 종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맡을수 있다. 책임을 맡는 이는 우선 글을 읽는 데 능숙해야 하며, 저자의 의도나 예상되는 독자층 그리고 그 글이 어떤 카테고리에 속하게 될지 가능한 한 정확하게 예상할 수 있어야 한다. 북디자인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서체다. 서체의 역할은 책의 내용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는 글자와 단어의 형태를 그 형태가 지닌 소리와 뜻으로 인식함으로써 읽는다. 즉, 독서란 시선이 글줄을 따라가면서 즉각적..

한밤의 도서관 2020.05.28

브러시에 낀 먼지를 떼어낸다는 것은

디자이너를 그만두고 싶다고 했지만, 디자인을 하기 싫다는 말이 아닙니다. 일은 재미있습니다. 단지 어렴풋이 디자인 세계에 답답함을 느껴 벗어나고 싶은 것 뿐입니다. 이런 상태에 대해 사회학자에게 물으면 마치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것 같은 ‘요즘 시대의 폐색감閉塞感’이라 할 테고, 심리학자에게 물으면 ‘과거의 트라우마’라고 할지 모릅니다. 주변에 털어놓으니 다들 쉬라지만, 원인을 찾아봐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니 답답할 따름입니다. 일러스트레이터는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가? 나는 지면과 광고의 내용에 어울리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클라이언트는 ‘요지후지의 작풍’만을 요구했다. 그대로 한다면 아마 1년만 지나도 식상하다는 소리나 듣고 버려질 것이다. 그런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어느 날 나..

한밤의 도서관 2019.10.10

이차원 인간

첫 학기에 나는 길을 잃고 절망했다. 이곳은 절대로, 내가 마음 놓고 있을 편안한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집에 있는 내 드로잉 테이블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랬다, 이곳은 규칙과 새로운 용어가 넘쳐났고, 각기 정교한 정의가 내려져 있었지만,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더 모호해졌다. 혼돈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다. 나 역시 혼돈 속에서 자랐으니까. 하지만 질서? 그것은 끝도 없는 프로토콜이었고, 동시에 추상이었다. 아니, 잠깐, 미안, 비구상이라고 해야겠다. 그것은 ‘이 흰 벽을 두 시간 반 동안 응시한 후 각자 본 것을 이야기한다’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 디자인 학교가 그렇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그렇게 실존주의적이어야 한다면, 나는 분명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그들은 내 포트폴리오에 좋은 반응을 보였..

한밤의 도서관 2019.07.02

활자기술

이 책은 활자 디자인에서 즉흥 연주를 하기 전 익혀야 하는 여러 규칙들을 엮은 것이다. 또한 포지티브 형태와 네거티브 형태를 보는 방식과 의도한 대로 형태가 보일 수 있게 조정하는 기술을 다룬다. 이 기술들을 배우면 배울수록 당신은 그것들을 잊고 디자인을 자유로이 구사하게 될 것이다. 용도에 따른 간격 안내판이나 작은 글자를 위한 활자체는 여백이 넉넉해야 가독성이 높다. 어두운 바탕에 밝게 표시된 경우에는 간격이 훨씬 넓어야 한다. 획의 두께 기계적으로 그려진 원과 사각형에서는 획의 가로 부분이 세로 부분보다 두껍게 보인다. 따라서 획 대비가 없는 활자체를 디자인하려면 가로획과 세로획에 약간의 대비가 있어야 한다. 대문자 크로스바 사각형의 수치적 중심과 지각적 중심은 다르다. H의 크로스바와 E의 가운데..

한밤의 도서관 2019.06.20

취직하지 않고 독립하기로 했다

어디엔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굳이 소리 높여 나의 장점을 강조해야 할까, 재치 있는 말로 나를 있는 대로 포장 해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나와 함꼐 일하고 싶어 하는지 아닌지에 대해 신경 쓰고 애써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결국 될 일은 되고 되지 않을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디자인, 건축, 예술 등 창의적인 분야에서는 업무 능력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 게다가 지금은 똑같은 기술을 가진 사람이 어느 때보다 많은 시대다. 인격 또한 극히 중요한 자질이며, 당신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포장하든(또는 포장하지 않든) 당신의 인격이 곧 당신의 브랜드가 된다. 열정을 나침반으로 삼는 것은, 확률적으로도 승산 있는 도전이다. 사람..

한밤의 도서관 2019.02.15

종이의 신 이야기

종이라는 표현수단을 갖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과 똑같이 자유롭구나, 예를 들면 성냥갑 라벨, 우유병 뚜껑, 책갈피, 전단, 화장지 등의 포장지 같은 장기보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진, 이른바 쓰고 버리는 인쇄물 종류를 ‘프린티드 에페메라’라고 한다. 에페메라는 ‘단명한’, ‘쓰고 버리는’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번역해보면 ‘하루살이 인쇄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인쇄용어다. “좋아하는 종이는 뭡니까?” “도쿄 올림픽 전에 변소(!)에서 쓰던 휴지와 옛날 만화 잡지에서 쓰던 종이.” “색깔을 늘리면 늘릴수록 변명할 여지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설명할 여지가 없는 한 가지 색깔이라는 범주에서 얼마나 뛰어난 디자인을 해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요.” “행복한 우연과 그리고 역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한밤의 도서관 2018.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