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리소설 9

디오게네스 변주곡

란유웨이는 그녀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보듯 잘 알고 있다. 현대인은 자기 집 유리창은 불투명 유리로 바꾸면서 인터넷에는 사적인 정보를 마구 공개한다. 란유웨이는 늘 그런 모순된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파랑을 엿보는 파랑 中 "창작을 위해 살인을 한다니, 누가 그런 범행 동기를 믿어주겠나? 언론이든 경찰이든 자기들이 생각할 때 말이 되는 동기만 찾을 뿐이야. 그래야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고 보고서도 쉽게 통과되니까. 요즘 시대는 말이지, 아무도 '진실'에는 관심이 없어."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 中 나는 영화를 볼 때도 미리 시놉시스를 읽지 않는다. 배경지식 없이 보다가 깜짝 놀라는 쪽이 좋다. -숨어있는 X 中 더보기 디오게네스 변주곡 第歐根尼變奏曲(2019) [트위터책빙고 2020] 2..

한밤의 도서관 2020.05.02

페로몬 부티크

“지독한 향수 냄새뿐이야. 죽은 샤넬이 냄새를 맡고 소환될 정도로 넘버 5와 마드모아젤 향이 넘쳐나는 군.” 페로몬 부티크관능의 집과 저주받은 능력자들 한국 소설 왠만하면 정말 안 읽으려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 말 할거야...?) 표지 디자인이랑 띠지 홍보 문구만 믿고 샀는디.... + 첫 문장부터 진입 장벽 사나흘쯤 방치한 수염과 어둡고 창백한 피부, 가르마를 타 포마드로 붙인 머리에 또렷한 눈동자, 날카롭게 내달리는 콧대의 사내가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들어섰다. 그의 곁에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플래티넘 블론드헤어에 미러선글라스를 쓴 여자가 매달리듯 붙어 걸었다. 포마드 그렇다 치고 플래티넘 블론드 헤어 뭔데.... ㅇ ㅏ... 읽지말고 그냥 다시 팔까..... 추가로 감색 브리오니 슈트, 군더더기 없..

한밤의 도서관 2019.03.15

동트기 힘든 긴 밤

거리가 임신해서 아이를 낳기 위해 퇴학한 사실을 알게 된 이후, 그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시골 학교에 있는 늙은 교사들은 이 일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촌에서는 미성년자가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흔하다고 말했다. 그들의 눈에 살인과 방화는 교도소에 갈 범죄지만, 십 대 소녀의 원치 않은 임신은 그저 스스로 성폭행당했다고 말하지만 않으면 그리 대단한 문제도 아니었다. 사람이란 항상 끝까지 하고 싶어도 결국 포기하게 되는 일을 만나기 마련이지. 포기해도 좋고 붙잡고 늘어져도 좋아. 뭐가 옳고 뭐가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고, 포기하지 않는다고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는 것도 아니니까. “서류 몇 장만 가지고 누군가를 파악하려 한다면, 그 사람에 대한 정의는 그 종이만큼이나 얄팍할 겁..

한밤의 도서관 2019.01.04

시인장의 살인

“게다가 밀실을 이용해 현대 경찰을 속여넘기는 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행위야. 소설이나 드라마에 완전범죄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는데, 내 생각에 시체가 발견된 시점에서 사건은 이미 절반쯤 해결된 셈이나 마찬가지거든. 살해 방법, 범행 시간, 범행 동기……. 시체는 정보의 보물 창고니까, 진짜 완전범죄란 경찰을 항복시키는 게 아니야. 범죄 행위 자체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는 거지. 아무도 모르게 죽여서 아무도 모르게 시체를 처리하고 아무도 모르게 일상으로 녹아드는 것, 그게 바로 완전 범죄라고.” 띠지에 사상 최초 데뷔작으로 4관왕! 라고 써있단 말이지? 궁금해서 읽어봤다. 초반에는 옛날 추리소설 읽는 느낌이어서 90년대 책인 줄 알았음. (신선함이 없었음.) 재미도 흥미도 안 생겼는데, (진도가 안 나가 ..

한밤의 도서관 2018.07.27

미스테리아 17호

악마는 개념어가 아니라 디테일에 숨어 있다. 이미 죽은 사람의 생전을 글로 재구성해 세상에 내놓는 일은 낯 모르는 이의 장례를 함께 치르는 과정이어야 한다. “사람 사냥을 사명으로 삼는 사람은 그 일에 대해서 말하고 싶어져요. 어떻게 처리했는지, 얼마나 개판이었는지, 사람 죽이는 건 쉽지 않아요. 심신이 얼마나 힘든지 남들은 몰라요.” 사회가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다고 느꼈을 때의 공포는 ‘정상인’을 즉각 타락시킨다. 이소설에 따르면 당신이 ‘보통 사람’일 수 있었던 건 그 동안 운이 좋아서였을 뿐이다. -나카야마 시치리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 치아의 마모도와 세 번째 어금니인 사랑니의 형태와 성숙도를 관찰하는 것이다. 법의치과학을 연구한 치과 의사만이 이 검사를 할 수 있다(한국에는 불과 네 명만..

한밤의 도서관 2018.04.23

호수의 여인

“난 믿는 얘기만 기억하거든.”그는 몸을 기울여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편한 자세로 일어서 전혀 서두르지 않고 가운의 허리띠를 꽉 조인 뒤 소파의 끝으로 옮겨 앉았다. “맞아. 내가 재차 묻는 다른 이유는 자네가 지나치게 관찰을 한 게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서일세. 너무 세세한 점까지 보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만큼이나 증인으로서 신뢰할 수가 없거든. 언제나 그 중 절반 가까이는 지어내니까 말야. 주변 정황을 고려해서 정확하기 확인하는 거지. 아주 고맙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벽난로 위에 놓인 전자시계가 메마르게 웅웅거리는 소리 속에서, 저 멀리 애스터 드라이브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속에서, 협곡 너머 산기슭 위 비행기의 말벌처럼 윙윙거리는 소리 속에서, 부엌에 있는 냉장고..

한밤의 도서관 2016.02.10

빅슬립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도 무겁다. 하현달은 달무리를 드리운 채 래번 테라스의 유칼립투스나무의 높다란 가지 사이로 은은하게 비쳤다. 언덕 아래 낮은 곳에 있는 어떤 집에서 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요란했다. 젊은이는 가이거의 집 앞 상자 모양 울타리 너머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뒤 자기 앞의 운전대에 두손을 올려놓은 채로 앞을 똑바로 보면서 앉아 있었다. 가이거의 울타리에서는 아무런 빛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갈까 생각하다가 삶이 아주 지루하고 술을 한잔 하더라도 여전히 지루할 것이고 하루 중 어떤 때라도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은 어쨌거나 재미가 없겠거니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가벼운 발걸음, 여자의 발걸음이 보이지 않는 샛길을 따라왔고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앞으로 움직였는데 마..

한밤의 도서관 2016.01.19

불공정 한 것은 누구인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산세이도 서점 1층에 있는 신간코너로 바람을 쐬러갔다. 옆으로 나란히 놓인 신간들을 내려다본다. 아무 도움도 되지 않는 재테크 서적. 가벼운 실용서. 질 나쁜 대필작가가 휘갈겨 쓴 유명 연예인들의 책. 텔레비전 드라마의 노벨라이즈. 주인공에게 묘한 이름을 사용하고 있는 미스터리 하드보일드. 지나치게 센티멘털한 연애소설 '인기 있는 아저씨에게 필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 센스다' 라는 띠지를 두른 연애지침서. 그리고 엄청난 수의 자기계발서. 상사의 마음가짐. 부하의 마음가짐. 노후의 마음가짐. 삶에 대한 마음가짐. 마음이 부자인 삶을 위한 마음가짐. 세자키는 한 권도 사지 않고 그곳을 나간다. - 제1장 불공정한 시작 中 호감도란, 올리기는 어렵지만 떨어질 때는 한순간이다. 아아, 왜 ..

한밤의 도서관 2009.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