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에세이 3

꽃은 알고 있다

아마 여러분은 나와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을 테다. 적어도 40년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또 전 세계 대부분의 나라에서 여전히 그렇다. 내가 죽은 사람의 비강에서 나온 꽃가루를 채취하는 방법을 개발한 뒤 여기저기서 나를 '콧구멍 여인'이라고 불렀던 일이 문득 떠오른다. 그것 말고도 여러 이름으로 불려봤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범죄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자연세계의 한 측면을 해석해 형사들을 돕는 '법의생태학자'다. 집 안에서 범죄가 일어나면 수사관들이 법의학을 통해 조사할 방법이 제한적인 경우가 많다. 집 안은 이미 지문과 DNA로 잔뜩 뒤덮여 있고, 옷의 섬유도 여기저기에 묻는다. 행동분석가들의 연구에 따르면 누군가 무거운 사체를 끌고 갈 수 있는 한계 거리는 약 100미터다. 오늘..

한밤의 도서관 2020.04.18

서점의 일생

책방은 입장이 공짜다. 달리 말하면 갤러리나 마찬가지다. (책방 주인이 되고 보니 그게 서러워질 때도 있다. 처지에 따라 이렇게 바뀌다니) 그렇기에 호기심이 왕성한 꼬마가 날마다 드나들었던 것이겠다. 문턱이 낮고 공짜에 자극적인 정보가 넘쳐나는 곳. 이제는 개인 컴퓨터나 스마트폰으로 새로운 정보나 낯선 세계에 접속하는 시대다. 그런 기기로 더욱 멀고 깊은 세상까지 들여다볼 수 있다. 그러나 그곳에는 오감으로 느끼는 체험이 없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허다했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냈지만 전혀 외롭지 않았다. 담담하게 자유를 구가했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파악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쉬는 날이면 홀로 거리를 나서 걷다가 피곤하면 집에 돌아온다. 도심이 바로 옆에..

한밤의 도서관 2019.06.17

색맹의 섬

색맹은 푸르와 핀지랩 두 곳에서 한 세기 이상 존재했으며 두 섬 다 각종 유전자 연구의 주제가 되어왔으나, 그곳 사람들에 관한 인간적 (말하자면, 웰스식의) 탐구며 색맹 사회에서 색맹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러니까 자기만 완전히 색을 못 보는 것이 아니라 색맹 부모와 조부모, 색맹 이웃, 선생님까지도 색맹인 곳. 색에 대한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으며 그 대신 다른 형태의 지각 능력, 다른 형태의 관찰력이 증폭 돼 발달한 문화의 일원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에 관한 연구는 전혀 없었다. 암초 아래에서 아이들이 벌써 헤엄치며 놀고 있는데 아이는 이제 갓 걸음마를 덴 아기이지만 산호가 뾰족뾰족 솟아 있는 물 속으로 겁 없이 뛰어 들면서 신나서 빽빽 고함을 질러댄다. 색맹 꼬마 두세명도 물속으로 뛰어들어..

한밤의 도서관 2018.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