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쿠니가오리 7

기억 깨물기

무섭다고 아주 조금 생각했다.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건 무서운 일이구나. 그렇게 생각했다.-금과 은: 가와카미 히로미 편지에서 시선을 들어 문득 창밖을 바라보니 때마침 강풍에 휘날렸는지 아직 노란 물이 들지 않은 은행잎 하나가 빙글빙글 춤추며 날아가는 게 보였다.나도 모르게 고개를 내밀어 그 잎사귀를 눈으로 따라갔다.어디에서 왔니?어디까지 가니?바람이 기억의 나무를 뒤흔들어 추억의 잎사귀들이 푸르르 휘날렸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직감에 따라 정해지는 것이라서 충동적으로 ‘이 사람이다’라고 정해버려도 괜찮지만, 이별에는 충분히 시간을 들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 이별은 대체 어디에서 왔을까.어느새 그렇게 우리 바로 옆에까지 바짝 다가와 있었을까.-호수의 성인: 고데마리 루이 실현되느냐 마느냐 따위, 상..

한밤의 도서관 2015.01.12

치즈랑 소금이랑 콩이랑

1년 후, 5년 후, 어떠한 미래건 오늘이라는 날을 넘기지 못하면 영원히 오지 않는다. 걱정은 미래가 아니라 오늘, 지금 해야 한다.-신의 정원 中 이유가 수없이 많다는 말은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하고 똑같지 않을까, 하고. 자연은 명쾌해서 좋다. 카를로는 그런 말을 자주 했다. 인간은 명쾌하지도 않고 단순해지지도 못해. 인간은 언제나 처음 일만 기억한다.첫 만남, 첫 데이트, 첫 키스. 처음 사랑을 나누었을 때의 일. 하지만 마지막 일은 언제나 흐지부지해진다. 그게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그 당시는 의식하지 못하는 일도 많고,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경우도 있다. 아아, 그때가 마지막이었구나 하고 우리는 언제나 멀리 있는 경치를 바라보는 사람처럼 회상할 뿐이다. -이유 中 어머니도, 바로..

한밤의 도서관 2013.07.22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세상에는 세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생각한다. 선량한 인간과 불량한 인간,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인간. 이도 저도 아닌 인간은 미치도록 선량을 동경하면서 속수무책으로 불량에 이끌리고, 그리하여 결국, 선량과 불량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채 평생 선량을 동경하고 불량에 이끌리면서 살아간다.-선잠 中 간다가 예약한 가게는 차이나타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언덕 위의 전망 좋은 장소이긴 했지만 가게는 초라했다. 원래는 화려했을 다 낡은 간판도 빛바랜 색조만큼이나 허허롭다.- 포물선 中 "모두 곧 죽을 텐데, 땅 같은 걸 사고 싶어 하는 그 심리를 모르겠어." - 맨드라미의 빨강 버드나무의 초록 中 우주냥이님께서 빌려주신 에쿠니 가오리 책.단편집인데, 러브 미 텐더, 밤과 아내와 세제 이 두 작품이 제..

한밤의 도서관 2012.02.01

달콤한 작은 거짓말

“밤이 되면 모두 집으로 돌아가잖아. 참 묘한 일인 것같아.” 여전히 밖을 보며 루리코가 말했다. “맨션 창의 불빛들을 보고 있으면 말이지, 저 한 집 한 집마다 제각기 사람들이 찾아 들어가다니 신기하다 싶어.” 사토시도 키가 그리 큰 편은 아니지만 루리코는 좀 더 왜소해서, 정수리가 사토시 턱 부근에 온다. 그렇게 서로 포개듯이 서서, 하얀 보름달이 떠 있는 하늘을 보았다. 여기서 조용히 자신을 기다린 아내가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낮에는 밖에 나가서 일을 하거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간혹 바람을 피우더라도 밤이 되면 각자 집으로 돌아오잖아. 참 신기한 것 같아.” 사토시는 얼어붙고 말았다. - 밤 中 루리코는 잘 모르겠다. 펑펑 울고 나면 후련해질까. 하루오가 만드는 공기, 하루오가 선택하는 언어, ..

한밤의 도서관 2011.04.28

차가운 밤에

가령 내가 쿄지를 열렬하게. 정말 죽을 것처럼 사랑하고 있다면 문제는 없다. 지금이라도 쿄지의 회사에 전화를 걸어 함께 저녁을 먹자고 할 수도 있다. 쿄지는 좋은 사람인데, 왜 좀 더 애틋하게 사랑할 수 없는 것일까. 왜 지금 당장 만나서 함께 저녁을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까. 왜 둘이 있으면 고독이 짙어지는 것일까. 이를테면 내가 좀 더 아빠와 엄마를 사랑하면 되는 일이다. 좀 더 솔직하고 좀 더 다감한 딸이 되면 되는 일이다. 집까지는 전철을 타고 30분. 전화를 걸어 요행히 남동생이 받으면, 차를 몰고 데리러 와줄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그 낯익은 식탁에서 넷이 함께 저녁을 먹을 수 있다. 어째서일까. 왜 그런 일이 이토록 싫을까. 진절머리가 난다. 치가 떨린다. 죽어도 싫다. 혼자 있는 ..

한밤의 도서관 2011.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