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머스H쿡 5

붉은 낙엽

제니는 명석하고 눈치도 빨랐다. 제니가 학교에 갔던 첫날, 집에 돌아와 내게 물었다. 왜 학교 선생님은 몇 번씩 말을 되풀이하냐고. 나는 제니에게 말해주었다. 한 번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제니는 내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마치 자연이 보여주는 불평등을 자기 상황에 맞춰 이해해보려 애쓰는 것도 같고, 그 불평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희생자 수를 헤아려보는 것도 같았다. 마침내 제니가 바다처럼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슬퍼. 못 알아듣는 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닌데.” “안녕, 잠꾸러기 씨.” 메러디스가 쾌할하게 말했다.주방 안의 공기에는 베이컨의 짭짤한 냄새와 끓는 커피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냄새는 가정을 가진 남자의 확실한 표시일 것이다. 싸구려 향..

한밤의 도서관 2015.04.21

채텀 스쿨 어페어

“새 환경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좀 걸릴 겁니다, 채닝 선생님. 하지만 여기서 금새 행복해질 거라고 확신합니다.”아버지가 얘기한 “행복”이 정확히 무얼 의미하는지 나는 알고 있었다. 따분한 일상과 제한된 활동 반경, 끈덕진 갈망을 조금도 채워줄 수 없는 쪼들리고 생기 없는 삶. 그들은 거창하게 로맨틱한 삶을 꿈꾸지 않았다. 특별히 재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한없이 따분한 것들에 집착하고, 진정한 열정 한 번 불태워보지 못한 채 청춘을 허비했을 뿐이다. 채텀 스쿨을 졸업하면 그들은 정해진 코스를 따라야 했다. 결혼하고, 경제적으로 독립하고, 아이를 낳고. 내게 그것은 따분하고 활기 없는 삶이었지만, 아버지에게는 당연하고 바람직한 삶이었다.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계단을 달려 내려가 채텀 스쿨의 커다..

한밤의 도서관 2015.03.30

심문

그래, 심문은 엄격한 규칙과 시간 제한에 따라 승부를 펼치며 상대를 때려 눞혀야 하는 한 판의 권투 시합과 다름 없었다. 시델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굴다리 아래를 뚫어져라 쳐다볼 뿐 이었다.그런 꼴을 보고 있자니 에디는 부잣집 도련님이라 배짱도 없나보다 싶었다. 그네들은 스스로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치면 공포에 질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뭐 그리 대수겠는가. 어차피 많은 것을 통제하며 살아갈 인간들인걸. 저치는 훗날 시델 쓰레기 수거 업체를 통제할 것이고, 따라서 자신도 쥐락펴락하게 될 것이었다. 이런 사실에 속이 상한 에디는 더 이상 생각을 말자며 눈앞의 문제에 정신을 집중했다. 찰리는 단언했다.“삶의 기술은 해야만 하는 일을 기꺼이 웃으며 하는 거야.”바로 그게 문제였다. 에디에게는 활짝..

한밤의 도서관 2015.01.20

밤의 기억들

그레이브스는 버스를 타러 가기 전에 좀 쉬고 싶었다. 주변 경치가 달라지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낯선 냄새가 나면 예민해지는 성격이라 이동할 때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는 잠을 청하는 대신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한 채 차창을 스치며 지나는 마을과 도시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고 모든 곳에서 악마를 보는 사람들과,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악마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공포에는 한계가 있다거나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의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편안한 생각을 다시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열망도 있었지만, 그런 마음도 사그라진 지 오..

한밤의 도서관 2015.01.08

줄리언 웰즈의 죄

“어디서 들은 말인데,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 채찍을 휘두르기 전이 아니라 휘두르고 나서래.” 마을 외각으로 빠지는 도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줄리언이 말했다. 그러고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정작 중요한 건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아니겠어? 죄책감은 사치야, 필립.”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는데.” 줄리언이 부드럽게 말했다. “인생은 그림자 게임이라고, 친구.”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줄리언에게로 내려갔어야 했다. 인생에 해피엔딩만 있다면, 친구라면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어스름한 불빛 속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발견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친구는 자신..

한밤의 도서관 2014.0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