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붉은 낙엽

uragawa 2015. 4. 21. 17:30

제니는 명석하고 눈치도 빨랐다. 제니가 학교에 갔던 첫날, 집에 돌아와 내게 물었다. 왜 학교 선생님은 몇 번씩 말을 되풀이하냐고. 나는 제니에게 말해주었다. 한 번 말해서는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고. 제니는 내 말을 듣고 시 생각에 잠겼다. 마치 자연이 보여주는 불평등을 자기 상황에 맞춰 이해해보려 애쓰는 것도 같고, 그 불평등으로 인해 생겨나는 희생자 수를 헤아려보는 것도 같았다. 마침내 제니가 바다처럼 푸른 눈을 들어 나를 보며 말했다. “정말 슬퍼. 못 알아듣는 건 그 사람들 잘못이 아닌데.”



“안녕, 잠꾸러기 씨.” 메러디스가 쾌할하게 말했다.

주방 안의 공기에는 베이컨의 짭짤한 냄새와 끓는 커피 향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이 냄새는 가정을 가진 남자의 확실한 표시일 것이다. 싸구려 향수 냄새가 양아치 같은 남자의 정체를 드러내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나는 무엇을 알았던 걸까? 대답은 확실하다. 아무것도 몰랐다. 그리고 아무것도 모를 때 너는 어떻게 하는가? 너는 무지 속에서 다음 발걸음을 떼어놓는다. 앞으로 갈 수밖에 없기 때문에. 너는 그렇게 떼
어놓는 발걸음이 얼마나 무모한 짓인지, 혹은 그 결과로 생겨나는 보이지 않는 일들이 얼마큼 심각한 것일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두려움은 일종의 겸손, 즉 사람이 자신의 무력함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결국은 우리가 전혀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정말 모를 일이었다. 어쩌다가 내 아들은 밤을 좋아하게 된 것일까? 키이스는 밤이 주는 모종의 평화 같은 것을 좋아하는 걸까? 혹은 학교나 집에서 보낸 지겹기만 한 또 하루가 끝났다는 의미로 밤을 좋아하는 걸까? 아니면 밤이 다른 사람의 시선을 막아주기 때문에? 밤의 어둠에 휩싸인 채 푸른색 파카에 달린 모자 아래 숨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살금살금 돌아다닐 수 있어서 밤을 좋아하는 걸까?



“일이 망가지는 시점은,” 메러
디스의 말투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처럼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죽은 사람을 애통해 하는 사람처럼 분노와 슬픔이 어우러져 알아듣기 어려웠다. 
“모든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할 때예요.”



“경찰은 키이스와 면담을 해야만 했을 거야. 하지만 키이스가 뭔가 나쁜 짓을 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을걸.”

그 말에는 형의 특별한 적응 방식, 다시 말해 아무 생각 없는 낙관주의가 담겨 있었다. 워렌은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지 않을 정보만을 받아들여 생존할 길을 찾아내곤 했다. 고등학교 시절 워렌은 행복한 뚱보를 연기했고, 성인이 된 다음에는 유쾌한 술꾼 역할이 딱 어울렸다. 이제 형은 가족 대소사에 조언을 아끼지 않는, 분별 있는 집안 어른의 역할을 연기하고 있었고, 그 역할이 형을 기쁘게 했음이 틀림없었다.



내 차로 걸어가서 차에 올랐다. 하치만 시동을 걸진 않았다. 거의 꼼짝 않고 운전대 뒤에 앉아서, 인도 위를 걷는 사람들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혼자인 사람도 있고, 함께 걷고 있는 쌍도 몇 있고, 아이와 걷고 있는 가족들도 있었다. 그들은 완벽하게 태평스런 분위기를 풍기면서 작은 가게들 앞을 지나쳐 갔다. 그들은 마치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들, 음침한 지느러미가 수면을 가르고 나타나는 바람에 해변을 향해 허우적거리면서 도망치게 될 때까지는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근심 걱정 없는 순간에 탐닉하는 사람들 같았다.



“산책 좀 하고 올게.” 매러디스에게 짜증을 담아 말했다.

“산책이요?” 메러디스는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봤다. “지금 이 시간에 산책이라고요? 어디로 갈 건데요?”

나는 산책을 간 적이 없었지만,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건 알았다. 어디로 갈 것인지는 문제가 아니었고, 오직 집을 나와 메러디스와 그녀에게서 악취처럼 풍겨오는 패배와 좌절의 느낌으로부터 멀어져야 했다.

나는 돌아서서 문 쪽으로 향했다. “숲으로 갈 거야.” 할 수 있는 말은 그게 다였다.



“당신은 사람들이 실제로 얼마나 사악한지 몰라요. 그리고 앞으로도 알려고 하지 않을 테고.”



몇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메러디스는 한참 동안 책을 읽었다. 책 속에 자신을 놓아버리려고 노력하는 중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책을 읽는 행동은 골칫거리에 대응할 때 메러디스가 늘 쓰는 방법이었다. 메러디스의 어머니가 병환 중일 때도 줄기차게 책을 읽었다. 특히 그녀 어머니의 병상 옆에서는 더 열심히 책에 빠져 들었다. 어머니가 죽음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기 위해 미친듯이 애쓰면서 메러디스는 수많은 책을 집어삼키듯 읽어 나갔다.



우리는 주위에 폭탄이 터지고 있는 도중에 평화를 희망한다. 우리는 종양이 더 커지지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가지며, 우리의 기도가 빈 공간에 하릴없이 흩어져 사라지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는 사랑이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고, 우리 아이들은 무사할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우리가 탄 자동차가 화강암 절벽 앞에서 멈추는 순간에도, 혹은 우리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더라도 쿠션이 우리를 받아줄 거라는 희망을 갖는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고통 없는 죽음과 영광스러운 부활이라는 마지막 희망을 끈을 놓지 못한다.



시간은 무게감이나 중요성 없이 빠르게 흘러 보이지
 않는 흐름 위에 표류하는 것 같았고, 내 자신이 멀리 떨어진 뿌연 안개를 향해 흘러가는, 통제하는 사람 없는 취약한 배처럼 느껴졌다. 그 안개 뒤에는 맹렬하게 떨어지는 폭포가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나는 창 앞에 남아서, 아침 햇빛이 늘어진 나뭇가지 사이로 비쳐드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이 집을 둘러싼 숲의 작은 조각이 이토록 아름답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잠시 나는 우리가 이곳에 이사 오던 날을 회상했다. 트럭에서 짐을 부리는 동안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어떤 시간을 가졌던가. 날은 또 얼마나 화창했던가, 그날 우리가 이 완벽한 숲에 함께 모여, 모두가 웃고 또 웃으며 얼마나 행복해 했던가.



“형은 인생의 한심한 낙오자라기보다 그저 가지고 있던 많은 것을 잃은 사람일 뿐인지도 몰라.”



“자네 다 괜찮은 거지?”

이유 모를 깊고 강한 슬픔이 나를 덮쳤다. 나의 삶, 한 때는 편안했던 삶이 끔찍한 분노와 고통과 어우러지면서 위험과 혼란이 가득한 삶으로 변했다. “제가 어떻게 괜찮을 수 있겠어요, 레오? 이 마을에 사는 사람들 누구나 키이스가 에이미를 죽였다고 생각해요. 어떤 사람은 익명으로 경찰에 전화해서 메러디스, 키이스에게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방금은 빈스가 미쳤다는 말까지 들었고, 우리 가족 중 누구도 빈스하고 마주칠까 겁나서 마음 편히 아무 데도 갈 수 없게 됐어요. 이건 감옥이에요, 레오. 지금 우리 가족 모두는 감옥에 있어요.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다고요.”



몇 년 만에 처음으로 나는 감당할 수 있는 한계를 넘는 부담감을 느꼈고, 내 짐을 나눠 져줄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간절함이 생겨났다. 그 순간, 그렇게 짐을 나눠서 지는 것이야말로 결혼이 갖는 본연의 가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결혼생활에 대한 수천 개의 농담을 듣고 웃어왔다. 아무튼 결혼이란 얼마나 거창한 목표를 갖고 있는가. 한 사람과 일생을 함께하는 가운데, 그 남자나 여자가 가장 격정적인 욕구부터 일상적인 것까지 어마어마하게 많은 종류의 욕구들을 다 만족시켜줄 거라고 기대하는 일은, 척 봐도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생각이다. 결혼이 어떻게 그런 방식으로 기능할 수 있겠는가.



메러디스와 로덴베리가 함께 주차장에 있던 모습이 떠올랐다. 밤의 서늘한 공기 속에서 두 사람의 몸은 아주 가까웠고, 그들 주위에선 바람이 불 때마다 떨어진 나뭇잎들이 서걱거렸다. 
“늘 증거가 필요한 건 아니잖아.” 내가 차갑게 말했다. “때로는 그냥 알아볼 수도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