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우라시온 28

마호로 역 광시곡 (2013)

기억을 더듬어 죽은 이의 존재를 불러 깨우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잃었다고 생각한 행복한 시간이 되살아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무언가를 해주지도 받지도 못한다. 그런 죽음의 잔혹함에 싸우다 죽은 이를 단순한 죽은 이로 하지 않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 살아 있는 사람이 계속 기억하는 것. 비밀은 복잡한 직물에 생긴 보풀같은 것이다. 아무리 정성껏 아름다운 무늬를 짰다고 해도 작은 보풀 하나가 걸리면 실은 한 없이 풀어진다. "중요한 건 말이야. 제정신으로 있는 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끌려가지 말고 너무 기대하지도 말고, 늘 자기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보는 거야." "정신 상태?" "그래, 옳다고 느끼는 걸 한다. 하지만 옳다고 느..

한밤의 도서관 2022.03.12

마호로 역 번지 없는 땅 (2009)

아무리 탄탄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도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질 때가 있다. 계량기 바늘은 측정 불가능을 가리키고, 별이 소멸할 때처럼 막대한 에너지가 어두운 공간에 빨려 들어간다. 굵어진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실내의 빛이 비쳐 은색 테두리가 생긴 물방울이 다다에게는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배고파.” 교텐이 말했다. - 반짝거리는 돌 계란말이를 하고 전갱이를 구웠다. 된장국에는…… 버섯이 있었던가. 그리고 두부를 넣는 게 좋을까. 어젯밤에 예약해둔 전기밥솥이 마침 밥이 다 됐다고 알렸다. 좋았어, 현미밥도 지어졌고 다음은 시금치무침을 하고, 색이 좀 칙칙하니 토마토라도 썰자. 마호로 시민이 마호로 역 앞에 오는 것을 ‘마호로에 간다’라고 표현하는 건 어째서일까. 자기가 사는 곳도..

한밤의 도서관 2022.03.11

그 집에 사는 네 여자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유키노는 뭐든지 다 혼자 해왔다. 어른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경제적으로 자립해 혼자 사는 것은 어른이 됐다는 증거가 아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혼자 살 수 있는 인간은 없고, 돈도 어차피 천하를 돌고 돈다. 어디까지나 노동한 대가로 남에게 받는 것이지 유키노 본인의 가치를 나타내진 않는다. 양보하기도 하고 부대끼기도 하면서 누군가와 함께 살아가는 능력을 지닌 사람이야말로 어른일 것이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다. “너는 회사에 다니니까 누군가와 만날 수 있을 거 아냐. 그러면 혼자 사는 편이 아무래도 편리하지 않을까 해서.” “이보세요.” 유키노가 한숨을 쉬었다. “밖에 나가면 호감을 주고받을 사람을 만날 거라는 거, 네 환상이야.” “그래?” “그렇..

한밤의 도서관 2020.12.18

사랑 없는 세계

후지마루는 샤워를 하고 미리 만들어서 냉장고에 넣어둔 보리차를 마셨다. 오늘 하루도 열심히 일했다고 자평하며, 다다미 여섯 장 짜리 방에 이불을 깔고 타월 이불을 배에 올리고 드러눕는다. 알람을 해놔야지, 하고 스마트폰을 손에 들고 보니 친구에게 온 라인(LINE)이나 문자는 하나도 없었다. 어쩌면 난 외롭게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지만 덮쳐오는 졸음을 이길 수 없었다. 후지마루는 멍하니 생각한다. 배룰 채우는 것은 한때의 일. 맛있고 영양 밸런스가 잡힌 요리를 아무리 먹어도 결국 언젠가는 죽으니까. 아니, 그렇게 말한다면 어떤 행위도 다 무의미하다. 나도, 대장도, 혼고 대로를 걷는 모든 사람들도, 언젠가는 죽는다. 좋은 일을 해도, 나쁜 일을 해도, 언젠가는 모두 과거가 된다. 미안해요, ..

한밤의 도서관 2020.04.24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달리는 거 좋아해? 「風が強く吹いている」 (바람이 강하게 불고 있다, 2019)편성정보 일본NTV | 23부작, 2018.10.02 ~ 2019.03.26 |홈페이지 http://kazetsuyo-anime.com/트위터 https://twitter.com/kazetsuyo_anime 이야, 애니메이션 소식 듣고 오열함 이렇게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주니 호흡이 영화 보다 길어 너무 좋군. 1화 시작부터 너무 설렘 강아지 니라 너무 귀엽고 (공식 홈페이지 소개 보면 견종 불명 ㅋㅋ) 눈망울 또랑 또랑 어쩔... 만화책보다 등장인물들 다 잘생겨서 을매나 다행인지(만화책은 너무 소년 만화 느낌? 많이나......) 특히 왕자 내 취향 (만화책 콜렉션ㅋ) 왜 때문에 티셔츠 너무 못 달려서 니라 따라 달리는 특훈 ..

먼지쌓인 필름 2019.04.10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밤 바다를 건너려는 사람들의 길을 비추고제 아무리 작은 발걸음일지라도 멈춰 서지 않고언젠가 다음 누군가에게 바통을 넘기는 것... 舟を編む (배를 엮다, 2016)편성정보 후지TV 木 | 11부작, 2016.10.14~12.23 |홈페이지 http://www.funewoamu.com/트위터 https://twitter.com/funewoamu_anime 나 왜 이제 알았지?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고????? 공식 사이트 들어갔더니 구부정한 마지메가! 디테일 엄청 살리셨네욬? ㅋㅋ 전체적으로 영화보다 구성이 너무 좋다.각 회마다 단어로 시작, 단어 풀이로 마무리 + 짧은 에피소드 구성. 마지메랑 니시오카, 카구야 외모가 훨씬 나아졌어! 카구야 거의 여신 급인데, 영화에서는 아쉬웠던 ..

먼지쌓인 필름 2019.01.28

아무래도 방구석이 제일 좋아

자고로 생물이라면 배가 고플 때는 뭔가를 먹으면 되고 컨디션이 나쁠 때는 얌전히 자면 된다. 하지만 기계는 상태가 나빠도 대체 뭘 해야 호전되는지 짐작도 가지 않는다. 그들은 조용하게 그리고 갑작스레 상태가 나빠진다. 마치 기업의 전사로 일선에서 싸우다 과로로 쓰러지는 아버님들 처럼, 혼자 있을 때 술을 홀짝홀짝 마시다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어머님들처럼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망가지는 것이다. - 백설공주의 독 사과 中 “그야 남성이라는 생물과 도무지 인연이 없는걸요. 가끔씩 생기는 만남도 살리지 못하고, 세상의 절반이 남성인데도.” “에이, 그건 너무 단편적인 생각이에요.” 뭐, 그 말도 맞다. 남성과의 사랑에 인연이 없다고 해서 동성애자라는 건 단순하기 짝이 없는 어리석은 논법이리라. “미우라 씨는 여자..

한밤의 도서관 2018.07.05

마사 & 겐

겐지로는 쾌활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니마사는 순순히 수긍할 수 없었다. 젊을 때보다 죽음이 가까워진 만큼 두려움도 커진 탓인지 모른다.지금까지 만나고,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도 내가 죽으면 깨끗이 지워지는 걸까. 혼자 지내는 밤은 느리게 흘러간다. 화장실에 가느라 두 번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도대체 날은 언제 새나’하고 진저리를 쳤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해서 활력이 샘솟는 것도 아니면서.이건 뭐,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야. 구니마사는 반듯하게 드러누운 채 컴컴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나이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화가 나는지 우스운지 개운한지 모를 복잡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아침까지 요의 때문에 깨지 않고 잠들기를 빌었다. 허무함은 삼키면 되고, 쓸쓸함은 습..

한밤의 도서관 2015.09.17

천국여행

장작불에서 조금만 눈을 돌리면 주위는 숨 쉬기 힘들 정도로 어둠이 짙다. 지금까지 한번도 경험한 적 없는 밤의 깊이에 아키오는 몸을 웅크렸다. 어디선가 새가 울고 있다. 새겠지. 깍깍 소리가 비명처럼 들린다. 녹음이 발산하는 농후한 냄새 속을 아키오와 청년은 터덜터덜 걷는다. 나뭇잎의 방해를 받으면서도 지면에 내리쬐는 햇빛이 흑백의 감옥 같은 문양을 공중에 그린다. 이끼에서 증발하는 수분이 풍경을 흔든다. 모습을 볼 수 없는 새가 울고 어디선가 짐승이 마른 나뭇가지를 밟는다.끝이 없는 나무의 바다를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간다. 이 세상에서 언어를 가진 생물은 모두 사라진 것 같은 기분이다.꽤나 오래 걸은 것 같은데 나무의 바다 주변부에는 아직 도착하지 못했다. 여기서는 시간도 거리도 방향 감각도 인식의 틀..

한밤의 도서관 2015.07.11

마호로 역 앞 광소곡

まほろ駅前狂騒曲 (Tada's Do-It-All House: Disconcerto, 마호로 역 앞 광소곡, 2014)감독 오오모리 타츠시 원작 미우라 시온출연 에이타, 마츠다 류헤이, 코라 켄고, 마키 요코, 혼조 마나미, 아라이 히로후미홈페이지 http://www.mahoro-movie.jp/ 사랑해요 오빠들 계단에 깨알 광고 ㅋㅋ 버스 정류장에서 배차 시간 확인 하는 중 국방색 입고 숨어 있는 거 봐 ㅋㅋㅋ 그림 되는 오빠들 교텐의 매력 ㅋㅋㅋ 교텐 딸 너무 귀여움 오ㅃㅏ 새치...!!! 새치!!! ㅠㅠ 비바 마호로 ㅋㅋㅋㅋㅋㅋ 영상 화 된 미우라 시온 작품 중 제일 반응도 좋고사람들이 많이 본 작품 아닐까. 에이타랑 마츠다 류헤이 조합이 한 몫 더 하고.속편이 나오게 되면 기존하고 비슷해서 식상하기..

먼지쌓인 필름 2015.06.20

가무사리 숲의 느긋한 나날

여기 산을 다 베어내면 억만장자잖아요! 뭐 그런 셈인가 왜 이런 차 타세요? 벤츠 타자고요 벤츠! 너 진짜 바보냐 니가 살아갈 동안 밖에 생각 안 하지? 네? 뭐 이상해요? 선조가 심으신 나무를 전부 다 팔면 내 다음 세대 그 다음 세대는 어쩌라고? 100년도 못 가서 대가 끊겨 아... 그래서 묘목을 계속 심으면서 소중히 키워야 돼 이상한 일 같겠지만 말야 WOOD JOB!(ウッジョブ)~神去なあなあ日常~ (Wood Job!, 우드잡!, 2014) 감독 야구치 시노부 원작 미우라 시온 출연 소메타니 쇼타, 나가사와 마사미, 이토 히데아키, 유카, 니시다 나오미, 아리후쿠 마사시, 미츠이시 켄 미우라 시온 원작 2013년 읽은 책 중 가장 재미있다!에 꼽히는 책. 예전에는 나가사와 마사미가 나온다면 그냥 ..

먼지쌓인 필름 2015.05.19

사랑 [愛]

사랑[戀] 어느 사람을 좋아하게 되어서 자나 깨나 그 사람이 머리에서 안 떠나고 다른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몸부림치고 싶은 마음 상태 성취하면, 하늘이라도 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舟を編む (The Great Passage) [행복한 사전] 2013 • 감독 : 이시이 유야 • 원작 : 미우라 시온 • 출연 : 마츠다 류헤이, 미야자키 아오이, 오다기리 죠, 쿠로키 하루, 이케와키 치즈루, 아소 쿠미코, 코바야시 카오루, 카토 고 아 사랑합니다. 예고편을 본 순간, 너무 너무 보고 싶었던 영화. 근데 우리나라 영화 제목이 왜 이 모냥 이 꼴 이지?? [행복한 사전]이라니...그냥 원작 소설처럼 [배를 엮다] 였으면 좋았을걸!! 책을 읽고 영화를 보니, 밥 먹으면서 책 읽는 마지메 너무 잘 어울림.아 설..

먼지쌓인 필름 2014.06.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