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라타사야카 5

멀리 갈 수 있는 배

치카코는 이 회사를 보면 항상 정사각형으로 만들어진 벌집 같다는 생각을 한다. 거기에는 무수한 구멍이 규칙적으로 뚫려 있고, 솔의 빛이 속속들이 스며들고 있다. 결국 우주의 시간은 밝아졌다가 어두워지기를 반복하면서 영원히 이어지고, 자 신은 그 안을 떠돌고 있을 뿐임을 천천히 떠올렸다. 이렇게 함께 방에 있는데도 치카코는 츠바키와 다른 시간의 흐름 속에 있었다. 어느 쪽이 맞다가 아니라 양쪽 모두 올바른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같은 장소에 있는데도 다른 공간에 있는 것처럼. 그것이 조금 힘들 뿐이었다. “한참 동안 밖에 나가고 싶지 않았는데, 밖에 나가면 돌아가고 싶지 않을 거 같아요. 그래서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은 거예요, 나.” 음... 여태 읽은 무라타 사야카 작품 중 개인적으로 제일 별로. 20..

한밤의 도서관 2018.11.22

살인출산

“모리오카 씨는 죽이고 싶은 사람 있어요?”사키코의 질문에 “아이, 왜 그래요, 그냥 지카라고 불러도 돼요”라고 대답한 지카가 과자를 씹으며 한동안 허공을 바라보고 생각에 잠겼다. “으―음. 아주 살짝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많긴 하죠. 옛날 남자 친구가 바람피운 상대랑 곧 결혼한다는 소식이 들리니까 죽이고 싶고, 오늘 아침에 마주쳤던 치한도 죽이고 싶고, 으음 그리고 또 이 회사에서는 팀장이라고 해야 할까. 그 사람, 정말 히스테릭한 궁녀 느낌이라 열받아요. 실수도 다 상대 탓으로 돌리고, 정말 어이없지 않아요?” ‘출산자’는 열 번째 아이까지 다 낳으면, 곧바로 관공서에 살인신청서를 제출한다. 다음 날에는 살해당할 상대에게 전보 통보가 간다. ‘망자’에게는 그로부터 한 달의 유예기간이 주어진다. 살..

한밤의 도서관 2018.03.20

소멸세계

‘더럽혀진’ 나를 위로해주는 건 어릴 적부터 사랑해온 ‘저쪽세상’의 연인들뿐이었다. 그 연인들의 존재가 나를 정화해주었다. 속이 울렁거려서 앞으로 인간과의 연애는 불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대로 연인들과 무균실에서 살아가리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아이를 낳고 싶다는 막연한 동경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잿빛 거리는 비가 내리면 검게 물든다. 나는 빗물에 젖은 아스팔트 길을 걸었다. 밤이라 물웅덩이가 먹물처럼 보였다. 가로등이 비친 곳만 뿌옇게 밝은 회색으로 물들어 있어서 마치 수묵화 속을 걷는 듯했다. “당신은 역시 세상에 하나뿐인 가족이야. 봐, 당신과는 절대로 사랑에 빠지지 않잖아.” “부부니까 당연하지. 기다려봐, 금방 차 줄게.” 인간과의 연애는 자칫하면 금세 정형화되고 만다. 지금쯤 손을..

한밤의 도서관 2017.11.09

편의점 인간

‘손님’이 이렇게 소리를 내는 생물인 줄은 미처 몰랐다. 울려 퍼지는 발소리에 목소리, 과자 봉지를 바구니에 던져 넣는 소리, 차가운 음료가 들어 있는 냉장고 문 여는 소리, 나는 손님들이 내는 소리에 압도당하면서도 지지 않으려고 “어서오십시오!”를 되풀이해서 외쳤다. 아침에는 이렇게 편의점 빵을 먹고, 점심은 휴식 시간에 편의점 주먹밥과 패스트푸드로 때우고, 밤에도 피곤하면 그냥 가게 음식을 사서 집으로 돌아올 떄가 많다. 2리터들이 패트병에 든 물은 일하는 동안 절반쯤 마시고, 그대로 에코백에 넣어 집으로 가져와서 밤까지 마시며 보낸다. 내 몸 대부분이 이 편의점 식료품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나 자신이 잡화 선반이나 커피머신과 마찬가지로 이 가게의 일부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이 풍부한 감정으..

한밤의 도서관 2017.01.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