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챈들러 4

레이먼드 챈들러 - 밀고자외 8편

그는 갑자기 미소를 띠었다가, 이내 평생 미소를 지어 본 적이 없다는 듯 거두었다. 그가 이죽거리듯 느른한 음성으로 말했다. -밀고자 中 “도박사는 차 버려.” 다이얼이 잔을 건네주며 말했다. “녀석은 당신을 수렁에 빠뜨릴 거야.” 그녀가 잔을 홀짝이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이얼이 그녀의 손에서 잔을 빼내, 같은 자리에 입을 대고 마신 후 잔 두 개를 든 채 상체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다시 키스를 했다. -네바다 가스 中 그는 흔들의자에 앉아 몇 분 동안 꼼짝 않고 담배만 피웠다. 생각에 잠긴 그의 얼굴은 평온했고, 검은 두 눈은 다른 먼 세상을 향해 있었다. 마침내 그의 입꼬리에 단호한 미소가 걸렸다. 미소 속에 희미한 냉소가 배어 있었다. 미소를 지운 그는 묵묵히 집 안으로 돌아가서, 다시 시신을 끌어..

한밤의 도서관 2016.09.10

호수의 여인

“난 믿는 얘기만 기억하거든.”그는 몸을 기울여 담배를 비벼 껐다. 그는 편한 자세로 일어서 전혀 서두르지 않고 가운의 허리띠를 꽉 조인 뒤 소파의 끝으로 옮겨 앉았다. “맞아. 내가 재차 묻는 다른 이유는 자네가 지나치게 관찰을 한 게 아닌가 확인하기 위해서일세. 너무 세세한 점까지 보는 사람은 아무것도 보지 못한 사람만큼이나 증인으로서 신뢰할 수가 없거든. 언제나 그 중 절반 가까이는 지어내니까 말야. 주변 정황을 고려해서 정확하기 확인하는 거지. 아주 고맙네.” 침묵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다. 벽난로 위에 놓인 전자시계가 메마르게 웅웅거리는 소리 속에서, 저 멀리 애스터 드라이브를 지나가는 자동차의 경적 소리 속에서, 협곡 너머 산기슭 위 비행기의 말벌처럼 윙윙거리는 소리 속에서, 부엌에 있는 냉장고..

한밤의 도서관 2016.02.10

빅슬립

죽은 사람은 상처받은 마음보다도 무겁다. 하현달은 달무리를 드리운 채 래번 테라스의 유칼립투스나무의 높다란 가지 사이로 은은하게 비쳤다. 언덕 아래 낮은 곳에 있는 어떤 집에서 나오는 라디오 소리가 요란했다. 젊은이는 가이거의 집 앞 상자 모양 울타리 너머에 차를 대고 시동을 끈 뒤 자기 앞의 운전대에 두손을 올려놓은 채로 앞을 똑바로 보면서 앉아 있었다. 가이거의 울타리에서는 아무런 빛도 흘러 나오지 않았다. 나는 점심을 먹으러 나갈까 생각하다가 삶이 아주 지루하고 술을 한잔 하더라도 여전히 지루할 것이고 하루 중 어떤 때라도 혼자 술을 마시는 일은 어쨌거나 재미가 없겠거니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가벼운 발걸음, 여자의 발걸음이 보이지 않는 샛길을 따라왔고 내 앞에 있는 남자는 앞으로 움직였는데 마..

한밤의 도서관 2016.01.19

롱 굿바이

그는 흘낏 나를 보더니 다시 비에 젖은 차도로 시선을 돌렸다. 두 개의 와이퍼가 앞 유리를 조용한 소리를 내면서 닦고 있었다. “내가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군.” “미안해. 쓸데없는 말을 해서.” “돈은 얼마든지 있네. 누가 행복해지고 싶댔어?” 그의 말에 나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비웃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나는 술에 취하고, 굶주리고, 비참한 몰골을 하고 있으면서도 긍지를 지니고 있는 그가 좋았다. 아니, 정말 그랬을까? 단지 우월감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죽은 인간만큼 말썽을 피우지 않는 존재는 없다. 무슨 말을 들어도 항변하지 않기 때문이다. “웨이드 부인, 나의 의견 같은 것은 아무 뜻도 없습니다. 매일같이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듯한 인간이, 도저히 믿을 수 ..

한밤의 도서관 2014.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