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리즈키린타로 3

요리코를 위해

“하지만 당장 써야 할 소설 마감이 코앞이라고요.” “그런 건 개나 줘버려! 슬럼프에 빠졌을 때 용을 써봐야 아무 소용 없어. 억지로 매수만 늘린다고 좋은 글이 나올 거 같냐?” “인간이란 종종 가까이 이웃한 누군가에게 모든 죄업을 뒤집어씌우곤 합니다. 때론 거기서부터 비극이 태어나죠. 니시무라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진정으로 증오해야 할 적을 잃어버리고 손이 닿는 곳에서 증오의 표적을 정해버린 겁니다. 증오란 결코 이성으로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니까요. 아무리 남의 괴로움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친절한 사람이라도 동정에는 한도가 있기 마련이라고. 니시무라가 내게 관심을 가진 이유는 내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런 말로 이해할지 모르겠네요. 아니, 이건 아니다. 근거 없는 상..

한밤의 도서관 2020.06.22

녹스 머신

5. “탐정소설에 중국인을 등장시켜서는 안 된다.”정확한 근거는 알 수 없지만 “중국인의 두뇌는 너무 많은 지식을 쌓은 반면 도덕은 전혀 익히지 않았다”라는 궤변에 가까운 오래된 서양 속담 탓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책을 펼쳐 ‘친루의 찢어진 눈’ 식의기술이 보인다면 바로 책을 덮는 것이 상책이다. 그런 책은 졸작이라 생각해도 무방하다. 이런 관점에서 판단할 때 졸작이 아니었던 것은 해밀턴 경의 《멤와스의 4개의 비극》뿐이다. “자네가 이 원고의 내용을 알고 있다는 건가?”“네. 어쩌면 사제님보다도 더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제님께서 기록하신 십계를 근거로 박사논물을 썼을 정도니까요. 1. 범인은 소설 앞부분에 반드시 등장할 것. 단, 독자가 간단히 짐작할 만한 인물이어서는 안된다. 2. 온갖 초자연적인..

한밤의 도서관 2015.03.12

1의 비극

내 마음 속에 죄책감을 가리키는 미터기가 달려 있다면, 이 순간 바늘이 크게 왼쪽으로 꺾이며 일단 제로를 가리켰을 것이다. 하지만 바늘은 금세 오른쪽으로 돌아가 임계점에서 오락가락하고 있었다. 뭔가 잘못됐다. 나는 내 생각과는 다른 장소에 서 있었다. 시게루의 죽음에 대한 책임의식이 형용할 수 없는 뭔가에 의해 흐려져 있었다. 나도 모르게 내 손바닥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미우라를 쉬지않고 가격한 오른손이다. 설명하기 힘든 불쾌감이 들었지만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폭력 그 자체에 대한 혐오가 아니었다. 오히려 폭발의 방아쇠가 된, 내면에 존재하는 스스로에 대한 위화감이었다. 목격_부상한 남자 “밀실이란 추리소설에서 쓰는 기법의 하나로, 닫힌 공간에 타살 시체가 있지만 범인이 없고 심지어 침입이나 탈출 흔..

한밤의 도서관 2014.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