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803

마호로 역 광시곡 (2013)

기억을 더듬어 죽은 이의 존재를 불러 깨우는 것은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잃었다고 생각한 행복한 시간이 되살아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죽은 사람과는 두 번 다시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무언가를 해주지도 받지도 못한다. 그런 죽음의 잔혹함에 싸우다 죽은 이를 단순한 죽은 이로 하지 않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 살아 있는 사람이 계속 기억하는 것. 비밀은 복잡한 직물에 생긴 보풀같은 것이다. 아무리 정성껏 아름다운 무늬를 짰다고 해도 작은 보풀 하나가 걸리면 실은 한 없이 풀어진다. "중요한 건 말이야. 제정신으로 있는 거야.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끌려가지 말고 너무 기대하지도 말고, 늘 자기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보는 거야." "정신 상태?" "그래, 옳다고 느끼는 걸 한다. 하지만 옳다고 느..

한밤의 도서관 2022.03.12

마호로 역 번지 없는 땅 (2009)

아무리 탄탄하게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겨도 한순간에 모든 것이 무너질 때가 있다. 계량기 바늘은 측정 불가능을 가리키고, 별이 소멸할 때처럼 막대한 에너지가 어두운 공간에 빨려 들어간다. 굵어진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린다. 실내의 빛이 비쳐 은색 테두리가 생긴 물방울이 다다에게는 어떤 보석보다 아름다워 보였다. “배고파.” 교텐이 말했다. - 반짝거리는 돌 계란말이를 하고 전갱이를 구웠다. 된장국에는…… 버섯이 있었던가. 그리고 두부를 넣는 게 좋을까. 어젯밤에 예약해둔 전기밥솥이 마침 밥이 다 됐다고 알렸다. 좋았어, 현미밥도 지어졌고 다음은 시금치무침을 하고, 색이 좀 칙칙하니 토마토라도 썰자. 마호로 시민이 마호로 역 앞에 오는 것을 ‘마호로에 간다’라고 표현하는 건 어째서일까. 자기가 사는 곳도..

한밤의 도서관 2022.03.11

나는 그렇게 생각해 (2021)

텍스타일의 모든 요소는 자연에 기댄다. 쓰이는 재료가 모두 땅에서 자라고, 일상에서 피어나는 예술임과 동시에 강렬한 노동이다. 그래서 농사일과도 닮았다. 여담이지만 일본에서는 ご祝儀貧乏(고슈기빈보), 引越し貧乏(힛코시빈보)라는 말이 있다. 고슈기빈보는 잦은 결혼식 참석과 축의금 지출로 가난해진 사람, 힛코시빈보는 잦은 이사로 과다한 이사 비용을 지출하게 되어 가난해진 사람을 뜻한다. 그런 말이 있을만큼 일본은 축의금과 이사 비용이 비싸다. 특히 이사와 관련된 비용들은 정말이지 독특한 문화다. 한국처럼 월세만 꼬박꼬박 내면 그만인 게 아니다. 집을 빌려줘서 고맙다는 의미로 집주인에게 내는 돈 礼金(레이킨)이 있는가 하면, 계약 기간을 채운 세입자가 집을 나갈 때 그간 살면서 더럽힌 부분에 대한 수리비조로 ..

한밤의 도서관 2022.02.08

#트위터책빙고2021

#트위터책빙고2021 1. 트위터 [우리가 날씨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 - 2월 10일 - 하루에 한 끼가 어렵다면, 일주일에 최소 한 번은 채식하는 인간이 되자. 2. 블랙 [무자비한 알고리즘], 카타리나 츠바이크 - 2월 24일 - 표지가 블랙. 알고리즘을 구축할 때 데이터가 필요한데 여기서도 여성데이터는 소외됨. 도랐 3. 트렌드 [재택 HACKS], 고야마 류스케 - 3월 16일 - 새로운 걸 유연하게 받아들이고 배우는 자가 살아남는 것이겠지... 4. 건강 [은밀한 몸], 옐 아들러 - 3월 28일 - 번역 무슨 일이야! 엄청 재미있어!!! 5. 아시아 [둘이서 살아간다는 것], 사쿠라기 시노 - 3월 10일 - 나의 최애 작가님 중 한 명 ㅋㅋ 잔잔하니 찌통없이 좋았다. 6. 19세기 7. ..

한밤의 도서관 2022.02.02

일기를 에세이로 만드는 법 (2020)

일기는 의식의 흐름대로 쓴 글입니다. 형식이 없잖아요. 일기는 정말 내 마음대로 쓰는 글이니까,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짜증 나고 우울한 감정을 시간 순서대로 쭉 쓴 거예요. 한 단어, 한 줄로 끝나도 누가 뭐라고 하나요? 아무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에세이는 좀 다르죠. 내가 느낀 감정에 대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야 해요. 문장과 문장 사이에 맥락도 있어야 하고 그 에피소드를 있는 그대로 쓰는 것에서 마무리 짓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 마무리 지으면 일기가 되겠죠?) 내가 왜 그런 감정을 느꼈는가, 즉 왜 화가 났는지 왜 감동적이었는지를 ‘깨닫는 과정’을 한 번 더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이 과정에서 독자들은 공감을 해요. 써보지 않으면 알 길이 없는 게 바로 글쓰기입니다. 에세이를 어..

한밤의 도서관 2022.01.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