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미국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거야?” 다니엘이 물었다.
“대공황 때문에. 조선소에서 일하시던 아버지가 직장을 잃었거든.”
“그거 봐. 그게 자본주의라니까. 소시민은 죽어라 일하고, 부자들은 점점 배를 불리지. 경제가 호황이든 불황이든.”
“세상일이 다 그렇지 뭐.”
“세상에는 언제나 재수 없는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에요. 그런 사람들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죠. 그게 세상사예요.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요. 매해 바위종다리의 60퍼센트가 죽는 거 알아요? 무려 60퍼센트나요! 우리가 일손을 놓고 그 통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다가는 결국 우리도 그 60퍼센트에 속하게 될거라고요, 해리.”
우리는 젊고 연약한 나라요, 해리. 조금이라도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면, 이 나라에서도 법과 질서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단 말이오.
“교수님은 오늘날의 신나치주의에 대해 경고하시려는 것 같더군요.”
“경고가 아니라 역사적 평형성을 지적하려는 것뿐이오. 역사가의 임무는 밝혀내는 것이지 판단하는 게 아니라오.” 그는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많은 사람들이 옳고 그름은 절대적으로 고정된 개념이라고 생각하지. 하지만 그건 틀린 생각이오. 옳고 그름의 개념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다오. 역사가의 임무는 주로 역사적 진실을 밝히고, 자료에 뭐라고 나와 있는지 살펴 그것을 제시하는 거요.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역사가가 인간의 어리석음을 비판하기 시작한다면, 우리의 연구는 후세에 화석처럼보일 테지. 그들 시대의 통설의 잔재로.”
“궁금한게 있습니다, 보스. 사실은 죽음에 보험을 드는 건데 왜 생명보험이라고 할까요?”
묄레르는 한숨을 쉬며 책상 끝에 걸터앉았다.
“왜 사무실에 손님용 의자를 두지 않나, 해리?”
“의자가 없어야 용건만 빨리 말하고 갈 테니까요.”
“심리학자 입니다. 우리가 웃으면 얼굴 근육이 뇌에서 화학작용을 일으켜, 주위 세상을좀 더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자신에게 더 만족한다는 사실을 알아냈죠. ‘세상을 향해 웃으면 세상도 널 향해 웃을 것이다’라는 격언이 사실이라는 걸 증명한 셈이죠. 한동안은 엘렌 때문에 그 말을 믿었습니다.”
“첩보 활동이라고요?” 해리는 자신의 귀를 믿을 수가 없었다.
“전 스파이 업무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전 형사이지 스파이가 아니라고요. 혹시 잊으셨습니까?”
마이리크의 미소가 아슬아슬할 정도로 옅어졌다.
“금방 배우게 될 걸세, 해리. 그건 문제가 아니야. 이번 일을 재미있고 유익한 경험으로 생각하게.”
그는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알고 있었다. 아주 간단했다.
‘난 그런 예상은 하지 않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외무부 차관이라는 자리는 조금만 있어 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문을 이미 다 받은 듯한 느낌이 든다. 젊은 기자들은 대체로 그런 질문을 한 사람은 자신이 처음일 거라고 착각한다. 거의 밤을 세워가며 생각해낸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브란헤우그가 대답하기 전에 잠시 말을 멈추기라도 하면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실은 지금까지 그가 열 번도 넘게 받았던 질문인데 말이다.
어둠이 무섭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어둠이 무서웠던 적은 없다. 그가 무서운 것은 점점 빨라지는 시간이었다. 점점 심해지는 통증이었다. 이것은 새로운 경험이었고, 아직은 다루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다룰 수 있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리고 흐르는 시간은? 그는 분열, 또 분열을 거듭하는 암세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는 머리 위의 전나무 사이로 별일 반짝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고요했다. 너무도 고요하고 차가웠다. 그는 죽을 것이다. 모두 다 죽을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니 위안이 되었다. 그는 그 사실을 명심하려 애썼다. 그러고는 두 눈을 감았다.
“범인은 정신 이상자 일까요?”
“정신이 이상하다는건 상대적 개념일세. 우리는 누구나 정신이 이상해. 문제는 사회가 바람직한 행동이라 정해놓은 규칙에 어느 정도 부합하는 기능을 가졌느냐는 거지. 행동 자체만으로 정신병의 징후가 보인다고 말할 수는 없네.그 행동이 일어난 맥락을 살펴봐야 해. 예를 들어,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중간뇌에 충동 통제력이 있어서 같은 인간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주지. 인간이라는 종족을 보호하기 위해 생겨난 진화적 속성일세. 하지만 그런 역제력을 극복하도록 오랫동안 훈련받으면 역제력을 약해지기 마련이야. 예를 들면, 군인이 그런 경우지. 자네나 내가 갑자기 사람을 죽이기 시작하면, 정신이 이상해질 확률이 매우 높아. 하지만 청부살인 업자의 경우에는 꼭 그렇다고 할 수 없지. 그렇게 따지면 경찰도 마찬가지고.”
왜 죽음에 대한 공포는 나이를 먹을수록 심해지는 걸까? 오히려 그 반대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닐까?
지금은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행동해야 했다.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너무 피곤했다. 흥분 대신 갑자기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집으로 가서 침대에 누워 자고 싶었다. 깨어나면 이 모든 것이 꿈이 되어버리는 새로운 날이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