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마사 & 겐

uragawa 2015. 9. 17. 22:04

겐지로는 쾌활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말했지만 구니마사는 순순히 수긍할 수 없었다. 젊을 때보다 죽음이 가까워진 만큼 두려움도 커진 탓인지 모른다.

지금까지 만나고, 먼저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도 내가 죽으면 깨끗이 지워지는 걸까.




혼자 지내는 밤은 느리게 흘러간다. 화장실에 가느라 두 번 일어났지만 그때마다 ‘도대체 날은 언제 새나’하고 진저리를 쳤다. 새로운 하루가 시작된다고 해서 활력이 샘솟는 것도 아니면서.

이건 뭐, 천천히 죽어가고 있는거나 마찬가지야. 구니마사는 반듯하게 드러누운 채 컴컴한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나이 먹는다는 게 이런 건가.

화가 나는지 우스운지 개운한지 모를 복잡한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 이번에야말로 아침까지 요의 때문에 깨지 않고 잠들기를 빌었다.




허무함은 삼키면 되고, 쓸쓸함은 습관이 되면 괜찮다. 그렇게 자위하고 있었다. 마음속 어딘가에 아내를 먼저 보내고 아이도 없는 겐지로 또한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고 속삭이는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구니마사와 동급이거나 그 이상으로 고독해야 할 겐지로는 정작 조금도 ‘쓸쓸한 노후’를 보내는 기색이 없다. 어느샌가 젊은 제자를 들여, 뭔가 즐겁게 지내고 있다.

혼자만 덜렁 남겨진 기분이 든다. 저 녀석 잘 풀리고 있잖아, 하고 은근히 샘이 난다. 겐지로는 옛날부터 요령이 좋고 사람들한테 인기가 있었다. 열렬히 사랑한 여자와 결혼했고, 몸뚱이 하나만 있으면 먹고살 수 있는 기술도 지녔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퇴직하고 나니 오란 데도 없고 갈 데도 없는 자신과는 천지 차이였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과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던 자가 죽어서 어딘가에 이어지는 일이 어찌 있을까.

생명활동이 정지한 뒤엔 암흑이 남을 뿐이다. 두 번 다시 누구와도 맞닿지 못하고 무에 삼켜질 뿐이다.




“그거 나쁜 버릇이다, 마사.” 겐지로가 구니마사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런 식으로, 갖고 싶은 걸 갖고 싶다고 말해보지도 않고 포기하는 거, 너의 나쁜 버릇이라고.”




“내 생각엔 말이지…….” 겐지로가 빨간 열매로 눈길을 돌리고 조용히 말을 이었다. “죽은 사람이 가는 곳은 사후 세계 같은 데가 아니라 가까운 사람의 기억 속이 아닐까. 아버지도 어머니도 형제들도 사부도 집사람도, 다들 내 안으로 들어왔어. 가령 네가 먼저 간다 해도, 내가 죽는 날까지 너는 내 기억 속에 있을 거야.”




눈과 눈을 마주치는 두 사람의 옆얼굴. 그토록 사랑과 믿음이 담긴 눈빛을 구니마사는 본 적이 없었다. 겐지로와 하나에의 마음은 작은 배로 아라카와를 건넜던 밤부터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더욱 맑고 단단한 결정체가 되어 있었으리라. 소중한 것을 품은 듯 부드럽게 맞잡은 손. 서로의 미래를 신뢰하고 이끌어주는 손. 겐지로의 손은 하나에를 보물처럼 배에 태우던 그 반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불현듯 먼 어느 밤의 빛나게 일렁이던 수면이 떠올랐다. 강물이, 작은 배가, 각자의 앞길이, 희망을 싣고 가 행복으로 잇닿으리라 믿었더 시절. 겐지로와 하나에게 3초메 모퉁이 집에서 살고, 기요코가 티 없는 눈으로 구니마사를 향해 웃어주던 시절.

꽃도 폭풍우도 뚫고 나아가면 언젠가 평온한 노후가 기다리고 있을 줄말 알았는데 구니마사는 여전히 폭풍우가 몰아치는 한복판에 서 있다.

빛나던 청춘은 일찌감치 추억으로 변해, 구니마사의 기억 너머에서 원뢰처럼 희미하게 으르렁거릴 뿐이었다.




간밤에 혼자가 아니었다는 것. 넋두리를 늘어놓고 술을 나눠마시고 함께 곯아떨어질 죽마고우와 젊은 벗이 있다는 것. 구니마사는 그것이 그저 고마웠다.

남편과 아버지로는 낙제일망정 자신도 겐지로나 뎃페나 마미씨에게는 얼마간 쓸모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들 또한 구니마사에게 기대나 희망을 품어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어딘가에 이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마음이 든든해졌다.




“벚꽃도 벌써 다 지네.”

“내년이 있잖아.”

“우리, 내년에도 벚꽃을 볼 수 있을까?”

“글쎄.” 겐지로가 어깨에 내려앉은 꽃잎을 콧김으로 날린다.

“우리가 볼 수 없어도 벚꽃은 내년에도 내후년에도 피어. 그걸로 됐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