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밤의 기억들

uragawa 2015. 1. 8. 22:00

그레이브스는 버스를 타러 가기 전에 좀 쉬고 싶었다. 주변 경치가 달라지고 다른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리거나 낯선 냄새가 나면 예민해지는 성격이라 이동할 때는 좀처럼 잠을 자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그는 잠을 청하는 대신 신경을 곤두세우고 긴장한 채 차창을 스치며 지나는 마을과 도시를 응시하며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세상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을 겪고 모든 곳에서 악마를 보는 사람들과, 한 번도 그런 경험을 해본 적이 없어서 전혀 악마를 보지 못하는 사람들로 나뉜다. 그러나 무엇보다 무서운 것은, 공포에는 한계가 있다거나 뼛속까지 파고들 정도의 두려움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의 편안한 생각을 다시는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예전에는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고 싶은 열망도 있었지만, 그런 마음도 사그라진 지 오래였다. 젊은 시절 그를 가끔 괴롭히던 외로움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교류하지 않고 홀로 살아가는 데 익숙해진 것이다. 그의 삶은 슬로백이 말한 것처럼 ‘단지 숨 쉬는 일’에 불과했다.




그레이브스는 10분 후에도 여전히 식당에 앉아 있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많은 사람들, 강물처럼 흐르는 이름 모를 얼굴을 바라보는 그의 앞에는 세 번째로 주문한 커피가 차갑게 식고 있었다. 그를 이곳 맨해튼으로 이끈 힘도 바로 창밖으로 보이는 익명성에 대한 열망이었다. 끝없는 사람들의 홍수 속에 자신을 숨기고 싶었고, 얼굴 없는 군중 속에 자신을 녹이고 싶었다. 




사진이 든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는데, 오래전 공포가 자신을 옥죄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몸속에 든 수천 개의 조그만 철사가 갑자기 팽팽하게 당겨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철사들이 끊어지기 시작하면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를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레이브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서 뛰쳐나간 다음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터였다. 오두막에 도착할 무렵이면 그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온몸이 떨릴 것이다.




“어떤 인생이든 도덕적으로 순결한 시기가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않나요?”




“‘빛은 이미 어두운 사물을 더 어둡게 할 뿐.’ 슬로백이 한 말이에요. 왜 그는 그런 식으로 느끼죠?”

“세상이 살아있는 존재에 별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죠.”




그녀를 보면서 그레이브스는 혼자 외로운 인생을 살며 얼마나 많은 것을 포기했는지 생각했다. 죄책감 속에 묻어버린 자신의 인생은 원래 얼마나 충만하고 열정적이었을까? 아내도, 아이도, 앞으로 기대할 것도 없다. 오직 밧줄과 그걸 묶을 쇠막대 뿐이다. 그러나 지금도 그는 자신이 살아갈 수 있는 방식은 그것밖에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죽는다 해도, 자신이 알면서도 데려온 케슬러에게 온갖 고통을 당하고 죽은 누나와 함께 묻혀야 한다.




“자꾸 어디로 가는 거예요, 폴?”

엘리너가 물었다. 그녀는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마음속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과거 속으로요.”

그레이브스가 말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오래전 뉴욕이죠.”

그는 재빨리 덧붙였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가끔은 전부 다 죽이고 싶어요.”

그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한 채 말해버리고 말았다.

“케슬러, 사이크스, 심지어 슬로백도. 모두, 모든 것, 온 세상을 말입니다.”

절망적인 진실로 들리는 그녀의 대답에 그는 멍해지고 말았다.

“그건 외로움이에요, 폴. 외로운 감정만이 사람을 그런 식으로 만들 수 있어요.”




순간적으로 슬로백은 희망을 느꼈다. 뭔가 기적이 일어나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낡은 프록코트를 입은 리어든 경사일 수도 있고, 아니면 지루하게 순찰을 돌던 이름 없는 야경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문 뒤에서 나타난 것은 작은 몸을 움츠린 사람이었다. 모든 희망이 사라진 슬로백은 다시 몸을 좁은 옥상 끄트머리로 돌려 멀리 아래에 보이는 자신의 마지막 안식처가 될 도로를 내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