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시간 있으면 나 좀 좋아해줘

uragawa 2014. 1. 23. 00:33

그날 이후로 나는 가슴이 설레는 일이 생길 때면 그것이 오래가지 못하고 처참히 끝나버릴까봐 불안해하곤 했다.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때의 경험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아슬아슬한 어둠 속에서 느꼈던 섬뜩한 차가움, 할머니의 젖은 얼굴에 함부로 흔들리며 들러붙던 검은 머리카락. 모든 축제는 결국 끝나버린다는 공포감, 결국 아무도 남지 않을 거라는 두려움에 나는 몸을 떨었다. 모든 것은 떠나버린다, 시들어 버린다.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징어를 질겅거리는 율이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너도 언젠간 나를 떠나겠지. 하지만 내가 고백하지 않으면 결코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억눌렀던 감정의 반발심일까. 율이를 좋아하는 마음을 말하지 못하고 속으로만 삭이다보니 어느새 기묘한 감정으로 숙성되고 있었다. 율이에게 아픔을 주고 싶다. 놀라서 나를 돌아보게 하고 싶다. 바닥이 안 보일 정도로 깊게 구덩이를 파서 율이를 빠뜨리고 그 사실을 혼자서만 알고 싶다. 내 감정에 냄새가 있다면 아주 시큼한 냄새일 것이다. 음흉하고 야비한 냄새. 세상이 무대라면 그리고 내가 배우라면, 신은 나를 무슨 역할로 캐스팅한 걸까. 짝사랑 때문에 미쳐버린 음흉하고 야비한 단역 정도겠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차라리 잠에빠져버렸으면 하고 간절히 바랐다. 나는 얼마나 더 많은 잠을 자야 노인이 될까. 쓸데 없이 싱그러운 청춘이 성가셨다. 단번에 나이를 먹어 안타까움도 그리움도 없는, 밟으면 바삭, 하고 소리가 나는 노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집들이 서로 드문드문 떨어져 있는 산골에서 매일 새벽 소리없이 일어나 밭을 메고 가축을 돌보며 하루하루를 변화 없이, 똑같은 날을 사는 노인이 되고 싶다. 나무에서 떨어지는 과일만 주워 먹고 수십 년간 친구를 만나지도 않고 살다가 죽은 후에는 근처 차가운 산에 묻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