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당신 인생의 이야기

uragawa 2014. 2. 4. 22:46

그리고 이렇게 느낄 때도 있었다. 천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높게 솟아 있는 수직의 깎아지른 절벽이며, 배후에 있는 흐릿한 대지도 이와 똑같은 절벽이고, 탑은 이 두 절벽 사이로 팽팽하게 쳐진 밧줄이다. 아니, 가장 끔찍했던 것은 한순간 위아래의 구분이 사라져 버리고, 자신의 육체가 어느 쪽을 향해 끌리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가 없었던 순간이었다. 높은 곳에 대한 공포를 닮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지독했다. 뒤숭숭한 잠에서 깨어나면 온몸이 땀에 젖어 있고, 자면서 벽돌 바닥을 움켜쥐려고 했던 탓에 손가락이 경련을 일으키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그는 광산의 갱도 안에서는 결코 맛볼 수 없었던 두려움을 맛보았다. 천장이 머리 위로 무너져 내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힐라룸은 물이 천장에 닿기 직전에 마지막 숨을 들이쉬고는 균열 속으로 헤엄쳐 올라갔다. 죽더라도 그 어떤 인간보다도 높은 곳에서 죽고 싶었다.

-바빌론의 탑 中



똑같은 악몽이 또다시 되풀이 된다. 세 번째로 깨어난 다음에는 도저히 다시 잘 생각이 들지 않았다. 동이 틀 때까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것이 그 결과일까? 나는 미쳐 가고 있는 것일까?



사내는 바텐더에게 마음 내키는 대로 적당한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 그는 강박적인 거짓말쟁이이지만, 자신의 인생보다 더 멋진 인생을 경험하고 싶다는 욕구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기만하는 자신의 능력에 희열을 느끼는 타입이다. 사내는 바텐더가 손님 말에 흥미를 느끼는 척하기는 하지만 내심 무덤덤하다는 것을―이것은 사실이다―알고 있지만, 바텐더가 여전히 자신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다는 것을―이것 또한 사실이다―알고 있다.

-이해 中



로라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생각할 때마다 칼은 경이로움을 느끼곤 했다. 대학원을 졸업한 이래 로라와는 연락한 적이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그녀는 어떤 인생을 일궈 왔을까? 그녀는 어떤 남자들을 사랑했을까? 당시 칼은 그녀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어떤 종류의 사랑인지를 인식하고, 또 어떤 종류의 사랑이 아닌지를 인식했고, 그것을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게 여겼다.



레네 자신의 증명은 그녀를 조롱했고, 바보로 만들었다. 마치 퍼즐 책에 나와 있는 난제 같았다. 문제를 풀었다고 생각하면 틀렸어, 틀린 곳을 모르고 그냥 자나쳤군, 이라고 말하며 무엇이 틀렸는지 찾아보라고 요구하는 종류의 문제이다. 겨우 찾았다 싶으면 아니, 또 틀렸어라는 대답이 돌아오는 것이다.



힐버트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만약 수학적 사고에 결함이 있다면, 우리는 진실과 확실성을 도대체 어디서 찾아내야 한단 말인가?”

-영으로 나누면 中



의미표시 언어를 읽는다는 새로운 경험에는 <헵타포트 A>의 경우와는 달리 사람을 매료하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글을 쓰는 실력이 향상되고 있다는 사실도 나를 들뜨게 만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쓰는 문장들은 점점 더 모양이 좋아지고, 더 면밀해졌다. 너무 깊이 생각하지만 않으면 오히려 더 매끄럽게 쓸 수 있는 수준까지 도달했다.



내가 너를 들어올려 한쪽 옆구리에 끼고 네 침대로 데려가는 동안 너는 계속 징징거리지만, 내 머릿속에는 오직 나 자신의 고뇌에 관한 생각 밖에는 없어. 내가 자라서 나중에 부모가 되면 이치에 맞는 대답을 아이에게 해 주자, 내 아이를 지적이고 자기 생각을 가진 하나의 인격체로 대접해 주자, 하고 거듭 맹세했던 어린 시절의 내 결심은 전부 어디로 갔는지. 난 내 어머니와 똑같은 존재가 되려 하고 있어.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것에 저항할 수도 있지만, 내가 이 길고 끔찍한 비탈길에서 아래로 미끄러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되돌릴 수는 없어.



자유는 환상이 아니다. 그것은 순차적 의식이라는 맥락에서는 완벽한 현실이다. 동시적 의식의 맥락에서 보면 자유는 의미가 없지만, 강제 또한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결국 맥락이 서로 다를 뿐이고, 한쪽이 다른 쪽보다 더 타당하다거나 덜 타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네 인생의 이야기 中



어린 시절 닐은 자신이 신이 내린 벌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 적도 이따금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학교의 같은 반 아이들 탓으로 돌렸다. 아이들의 천연덕스러운 잔인함과, 희생가의 감정적 갑옷에 생겨난 허점을 찾아내는 본능적인 능력과, 새디즘을 통해 친구들 사이의 우정이 강화되는 방식―――닐은 이것들을 신이 아닌 인간 특유의 행동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같은반 친구들은 툭하면 신을 들먹이며 그를 조롱했지만, 닐에게는 이들의 행동을 신의 잘못으로 돌리지 않을 만큼의 분별이 있었다.



인생이란 그런 법이었고, 어차피 지옥은 인간계보다 물리적으로 더 나쁜 장소가 아니다.



정의는 언제나 보답받고 죄인들은 벌을 받는다는―정의나 죄의 기준이 도대체 무엇인지 그는 여전히 확실할 수가 없었지만―이야기 속에서 살아가는 편이, 아무런 정의도 존재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것보다 차라리 낫지 않을까.



이런 시도에는 성공 아니면 실패 라는 느낌이 따라붙었고, 닐에게 이것은 두려운 동시에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신을 사랑하려고 시도하며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점점 더 견딜 수 없는 일로 느껴졌다. 몇 십 년동안이나 시도하고도 결국 실패할 수도 있는 것이다. 아니, 몇 십 년이나 남았는지도 의문이다. 최근 들어 정말로 자주 깨닫게 된 일이지만, 천사의 강림은 사람들에게 영적인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경고로서 작용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제든 찾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내일이라도 죽을 수 있지만, 가까운 시일 안에 통상적인 방법으로 돈독한 신앙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 했다.



대다수의 주민들 입장에서는 지옥은 지상과 그리 차이가 나지 않는다.그곳에서 경험하는 가장 큰 벌은 살아 있었을 때 충분히 신을 사랑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회오이고,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결딜 수 있었다.

-지옥은 신의 부재 中 



매력 없는 용모를 가진 사람들에 대한 이런 편견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넓게 퍼져 있습니다. 사람들은 누가 따로 가르쳐 주지 않아도 혼자 알아서 이런 차별을 실행합니다. 이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한심한 일이지만, 현대 사회는 이런 경향에 맞서 싸우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조장하고 있다는 점에서 문제의 심각성을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외모 지상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공평하게 사람을 판단하고, 상대방의 외모에 영향을 받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자동적인 반응만은 억제할 수 없습니다. 자신은 그럴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소망 충족적인 사고에 빠져 있는 겁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십시오, 매력적인 사람을 만났을 때와, 매력적이지 못한 사람을 만났을 때 당신이 보이는 반응에는 차이가 있지 않습니까?

-외모 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멘터리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