켄리우 2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세계 곳곳에서 삶이 영원히 이어졌지만, 사람들은 전보다 더 행복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함께 나이 들지 않았다. 함께 성숙하지도 않았다. 아내와 남편은 결혼식 때 한 선서를 지키지 않았고, 이제 그들을 갈라놓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권태였다. - 호(弧) 소에보는 초고층 빌딩은 풍경의 일부로 여기면서도 에스컬레이터를 보고는 겁에 질렸다. 자동차와 고속도로와 자기보다 훨씬 크고 피부색도 다양한 인파가 잰걸음으로 걸어가는 광경은 어찌어찌 받아들였지만, 아이스크림이 준 충격 앞에서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유당 분해 효소가 없어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면 배앓이를 하면서도 더블 콘이 주는 쾌락을 누리려고 복통을 이겨냈던 것이다. 개는 줄에 묶인 반려견만 봐도 멀찍이 피했지만, 공원에 사는 오리와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

한밤의 도서관 2020.09.19

종이 동물원

"어머님 전화번호가 어떻게 되지요?" 사이는 전화기로 손을 뻗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어제 일어난 큰 사건이 뭔지 얘기할 수 있나요? 3년 전에 사서 재미있게 읽은 책은 뭔가요? 마지막으로 헤어진 애인하고 사귀기 시작한 때는?" 사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봤지요? 틸리가 없으면 당신은 일을 할 수가 없어요. 자신의 삶조차 기억 못 하고, 어머니한테 전화 한 통 못 겁니다. 이제 인류는 사이보그입니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의식을 전자(電子)의 영역으로 확장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자아를 두뇌 속으로 다시 욱여넣기가 불가능합니다." -천생연분 中 내가 지금 느끼는 기분이 바로 그거야. 마음이 탁 트인 기분, 만사가 태평한 기분, 어디에든 적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 말이야. 그래, 내 삶은 이..

한밤의 도서관 2019.1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