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아성에 장미는 피지 않아요. 유가오 씨. 붉은 장미도 노란 장미도 파란 장미도…… 검은 장미조차도.”빛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은 피지 않는다. 태어나는 건 하얀 알비노 뿐이다. “지금까지의 얼개로 흘러간다면 하얀 까마귀도 사라져버리겠죠.” 의외의 말이었다. 평면 세계를 이야기하던 중에 느닷없이 시계열時系列이 끼어 들었다. 기사라즈는 잠시 생각하는 척했다. 척……이라는 말을 쓴 것은 그가 할 말을 떠올리는 데 일 초씩이나 걸릴 리 없기 때문이다. “글쎄.” 언제나 그런 말만 앞세운다. 그 이상은 알려줄 수 없다는 뜻이리라.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뜨뜻미지근하지만 등줄기를 싸늘하게 식히는 바람이 불어왔다. 휘이익, 하고 불길한 울림을 내며 출구 쪽으로 흘러간다. 푸른 까마귀의 발소리일까? 계단을 내려갈수록 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