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선량한 차별주의자

uragawa 2019. 10. 15. 22:00

토크니즘tokenism이란 이렇게 역사적으로 배제된 집단 구성원 가운데 소수만을 받아들이는 명목상의 차별시정정책을 말한다. 토크니즘은 차별받는 집단의 극소수만 받아들이고서도 차별에 대한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다. 기회가 열려 있는 것처럼 보이고, 노력하여 능력을 갖추면 누구나 성취할 수 있다는 기대를 주기 때문이다. 결국 현실은 이상적인 평등의 상황과는 꽤 먼 상태임에도 평등이 달성되었다고 여기는 착시를 일으킨다.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학자들은 평범한 사람들이 가진 특권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발견’인 이유가 있다. 일상적으로 누리는 이런 특권은 대개 의식적으로 노력해서 받은 것이 아니라 이미 가지고 있는 조건이라서 많은 경우 눈치채지 못하기 때문이다. 특권은 말하자면 ‘가진 자의 여유’로서, 가지고 있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자연스럽고 편안한 상태이다.



남성특권 목록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되었다.

· 내가 승진에 자꾸 실패한다면 그 이유가 성별 때문은 아닐 것이다.

· 나는 밤에 공공장소에서 혼자 걷는 걸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

· 내가 책임자를 부르면 나와 같은 성별의 사람을 만날 것이 거의 분명하다. 조직에서 더 높은 사람일수록 더욱 확신할 수 있다.
· 내가 운전을 부주의하게 한다고 해서 나의 성별을 탓하지는 않을 것이다.
· 내가 많은 사람과 성관계를 한다고 해서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 나의 외모가 전형적인 매력이 없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며 무시할 수 있다.

이런 특권들은 대개 알아차리기 어렵다. 백인이나 남성의 신체로 살아가는 동안 나의 의도나 노력과 무관하게 펼쳐지는 일상적이고 자연스럽고 당연하고 정상적인 조건이자 경험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어떤 조합, 즉 전형적인 성별, 나이, 인종·민족, 직업 등을 떠올린다. 바나지와 그린월드는 사람들이게 기본값인 디폴트가 있다고 설명한다. 예컨대 ‘미국인’이라고 하면 백인-남성-성인을 떠올린다. ‘한국인’이라고 하면 어떤 특징이 떠오르는가? 혹시 남성-중년-회사원과 같은 이미지는 아닌가? ‘예멘인’에 대해서는 어떤 디폴트를 가지고 있는가?
동시에 사람들은 범주를 구분 짓는 독특한 특징을 찾아내는 작업을 한다.



차별은 생각보다 흔하고 일상적이다. 고정관념을 갖기도, 다른 집단에 적대감을 갖기도 너무 쉽다. 내가 차별하지 않을 가능성은, 사실 거의 없다.




좀 더 근본적으로 따져보자. 소위 명문대학이  인기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명문대학이 교육의 질이 더 우수하기 때문일까? 그러니까 내가 더 우수한 인재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있기 때문에 명문대학을 선호하는가? 아니면 그 대학이 가진 ‘간판’ 때문인가? 다시 말해 특별히 내가 무엇을 하지 않더라도 그 대학을 다닌다는 사실 만으로도 이득을 보기 때문인가? 물론 둘 중 어느 하나로 잘라 말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대학 입시가 그렇게 중요한 이유는 대학이 취업, 결혼 등 인생 전반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이왕이면 높은 서열의 대학에 가는 것이 유리하다. 연구 결과를 보면, 실제로 출신 대학에 따라 대학을 졸업한 후의 임금과 삶의 만족도에 차이가 있다. 대체로 명문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돈을 더 많이 버는 “임금 프리미엄”이 존재한다. 상위권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 미래에 생활 전반의 만족도도 더 높아서 “행복은 성적순이 맞다”는 연구 결과가 나오기도 했다.



한국의 성별임금격차는 실제로 심각한 수준이다. OECD 자료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임금이 남성에 비해 34.6퍼센트 적어, OECD 국가중에 그 격차가 가장 크다. 교육수준을 고려해도 차이는 여전하다. 교육수준이 낮은 경우에 성별임금격차가 더욱 크지만, 대학 졸업 이상인 사람으로 한정해서 보아도 동등한 교육수준을 가진 남성에 비해 여성의 임금이 28퍼센트 적었다.
그러니 성별에 따라 달라지는 전공과 진로의 ‘선택’이 과연 사회적 차별과 무관할 수 있을까? 여성으로서 어떤 전공이 취업에 유리할지, 결혼을 하고 자녀를 양육하게 되어도 일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어떤 직업이 좋을지 등의 선택은 이미 노동시장과 사회 전반의 차별을 전제로 이루어진다. 여성뿐만이 아니다. 장애인, 성소수자, 이주민 등 자신이 가지고 있는 불리한 조건을 인식하는 사람들은 그 조건에 맞추어 행동한다.



인생에서 중요한 일일수록 그 선택은 사회적 편견에서 자유롭지 않다. 아니, 최대한 안전한 결과를 얻기 위해 가장 보수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켄지 요시노는 그의 책 『커버링』에서, ‘손상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낙인이 두드러지게 보이지 않도록 최대한 자신을 포장하는 모습에 주목한다. ‘커버링’이라는 말을 통해 그는, 소수자로서 완전한 주류가 되지 못하면서도 동화주의적으로 순응하도록 요구받는 삶의 압박을 이야기 한다.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 등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약함, 불행, 부족함, 서툶을 볼 때 즐거워한다고 했다. 웃음은 그들에 대한 일종의 조롱의 표현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관점을 우월성 이론superiority theory이라고 한다. 토머스 홉스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자신이 더 낫다고 생각할 때 자존감이 높아지면서 기분이 좋아져 웃음이 나온다고 설명한다. 누군가를 비하하는 유머가 재미있는 이유는 그 대상보다 자신이 우월해지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키워드인 혐오표현hate speech은 약자들을 향한 언어유희의 현상으로 대표된다. 주로 인터넷 커뮤니티와 포털사이트의 댓글을 통해 특정 집단을 향한 비하성 언어들이 만들어지고 유통되었다. “똥남아”(동남아시아인), “똥꼬충”(게이), “급식충”(아동·청소년), “틀딱충”(노인), “맘충”(엄마) 등 사람을 ‘벌레’나 ‘똥’에 비유하여 비인격화하는 말들이 등장했다. 무엇이든 웃음거리가 된다면 괜찮다는 듯, 집단적 편견과 적대감이 봉인해제되었다.



누군가를 무언가로 호명할 수 있는 것은 권력이다. 누군가를 향한 놀림을 ‘가벼운’ 농담으로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 사람의 사회적 위치와 권력을 알려준다. 반대로 원하지 않는 기표가 자신에게 부착되는 경험은 소수자로서 사회적 위치와 무력한 상태를 확인시켜준다. 당신은 스스로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되고 있는가? 당신은 타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호명하고 있는가? 당신의 호명 권력은 어느 정도이며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수원의 한 주민센터에서는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를 “여사님”이라고 불렀다. 얼핏 높여 부르는 호칭 같지만 맥락을 보면 그렇지 않다. 정규직 공무원은 “주무관”이라고 부르는데 비정규직을 똑같이 “주무관”이라고 부를 수 없어 궁여지책으로 만든 호칭이었다. 나이가 어리면 “~씨”라고 부르고, 나이가 많은 남성에게는 “선생님”이란 호칭을 사용했다. 문제가 된 노동자는 40대에 가까운 여성이라 “~씨”도 “선생님”도 맞지 않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수원시 인권센터는 이 “여사님”이란 호칭이 비정규직을 낮추어 부르는 말로 불합리한 차별이라고 판단했다.



능력주의meritocracy는 “누구나 능력 있고 열심히 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다. 누구든지 노력과 능력으로써 높은 지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사회적 지위가 낮은 책임은 최선을 다하지 않은 개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 계층의 사다리를 올라갈 수 있는 기회가 누구에게나 주어지기만 한다면 평등한 사회라고 여긴다. 능력주의에 따르면 계층이 존재한다는 사실, 즉 불평등한 구조는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경쟁에서 쏟은 노력을 보상하기 위해 차등적으로 대우해야 정의로운 사회다.
능력주의의 관점으로 보면 많은 불평등이 정당하게 보인다. 본인이 불리한 위치에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불리한 대우를 받더라도 자신의 능력 부족이라고 생각하면 그 상태를 수긍하게 된다. 능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집단에 대한 불이익은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2011년 가을, 부산의 한 사우나는 구수진씨의 입장을 거부했다. 피부색과 생김새가 ‘외국인’이라는 이유였다. 구수진씨는 억울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이기는 하지만 이미 귀화한 한국인이라고 주인에게 항변했다. 하지만 사우나 주인은 “한국 국적을 취득했다고 해도 얼굴이 외국인이라서 안 된다”고 했다. 구수진씨는 112에 신고했고, 경찰이 출동했다. 이 사건은 어떻게 되었을까?
사우나 주인은 경찰에게 “외국인이라 에이즈에 걸렸을 수도 있다. 손님들이 사우나에 외국인이 오는 걸 싫어한다”면서 사정을 호소했다. 외국인을 받았다가는 한국인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이었다. 결국 구수진씨에게 다른 사우나로 가라고 안내하며 주인이 거부하면 경찰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한국에서는 대중시설의 주인이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국가 등을 이유로 손님을 거부해도 아무런 규제가 없다.



거리는 중립적인 공간인 듯 보이지만 그 공간을 지배하는 권력이 존재한다. 익명의 다수가 시선으로써, 말이나 행위로써, 혹은 직접적인 방해나 법적 수단을 통해 그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불온한 존재들을 단속하는 데 동참한다.



사실 누구나 어디서든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살면서 내가 있는 자리와 나의 위치에 따라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하지 못하는 상황을 수없이 경험한다. 싫은 걸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 건 권력이다. 이 권력은 잘 쓰이면 매우 의미 있다. 권력자를 향해 싫다고 표현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시민이 권력을 획득하는데 있어 굉장히 중요하다. 여성이 남성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부하가 상사에게 싫다고 말할 수 있을 때, 권력관계는 기존과 달라진다.



고용허가제는 한국인이 기피하는 직종에 고용주가 외국인을 고용할 수 있도록 허락하는 제도이다. 이주노동자는 원칙적으로 3년만 일하고 본국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고용주가 필요하다고 요청하면 기간을 조금 더 연장하여 일할 수 있다. 이주노동자는 마음대로 고용주를 떠날 수 없다. 법령이 정한 몇가지 사정에 한하여 제한적으로 직장 변경이 허락된다. 하지만 그나마도 고용주가 근로계약을 해지하거나, 직장이 휴업·폐업하거나 고용주가 부당처우를 하는 등 고용주 편에서 고용을 계속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을 때이다.
이 제도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앞의 문단에서 고용주雇用主를 사전적 유의어인 ‘주인’主人으로 바꾸어 읽어보자. 상황이 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고용허가제는 이주노동자에게 일할 권리를 주는 제도라기보다 주인이 외국에서 노동력을 들여올 권한을 주는 제도이다. 이주노동자는 자신을 채용한 주인에게 전속되고, 마음대로 주인을 떠나지 못한다. 한국에 얼마나 머무를 수 있는지 경정하는 권한도 주인이 가진다. 만일 허락 없이 주인을 떠나면 범법자가 되고 추방당한다.



멜빈 러너는사람들이 공정세계 가설just-world hypothesis을 품고 산다고 말한다. 세상은 공명정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열심히 한 만큼 결실을 맺는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게 믿는 이유는 그래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이 공정하다고 믿어야 장기적인 목표를 세우고 앞으로의 삶을 계획할 수 있다. 평범한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 믿음은 필요하다.



모두에게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말하지만, 실제로 다수자와 소수자의 자유는 같지 않다. 존 스튜어트 밀이 『자유론』에서 지적하듯, 다수자는 소수자의 의견을 거침없이 공격할 수 있다. 반면 소수자는 “부자연스러울 정도로 표현을 순화하고, 상대방에게 불필요한 자극을 주지 않도록 극도로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요구된다. 다수자는 소수자의 이야기를 듣지 않으면서 잘 말하라고 요구한다. 그렇게 사실상 침묵을 강요한다.
누군가의 말처럼, 정의는 누구를 비난해야 하는지 아는 것이다.



세계적으로 이미 실험은 시작되었다. 유럽과 미국등지에서는 ‘모든 젠더 화장실’all-gender restroom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트랜스젠더나 젠더규범에 부합하지 않는 외양을 가진 사람들, 보호자와 피보호자가 서로 다른 성별인 경우 등 다양한 조건에서 화장실의 접근 가능성을 높였다. 그냥 간판만 바꾼 건 아니었다. 새로운 설계들이 등장했다. 화장실 칸을 위아래가 뚫린 칸막이로 구분하는 대신 별도의 방으로 설계하여 사생활을 보호하고, 세면대를 화장실 칸 안에도 설치해 개별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아이리스 영은 ‘차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주목한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사람들에게는 몇가지의 정해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인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에서의 삶은 자신의 지위에 따라 크게 달라진다. 이런 사회에서는 지위의 유동성에 따라 개인의 만족감이 달라진다. 불평등이 있더라도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사람들은 안심한다. 하지만 그 편안한 지위에 오르기 위해 평생에 걸쳐 쏟는 수고로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불평등한 사회가 고단한 이유는 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노력으로 해결하도록 부당하게 종용하기 때문이다. 불평등이라는 사회적 부정의에 대한 책임을, 차별을 당하는 개인에게 지우는 것이다. 그래서 삶이 불안하다. 아프거나 실패하거나 어떤 이유로건 소수자의 위치에 놓이지 않도록 끊임 없이 조심해야 한다.



모두가 평등을 바라지만 ,선량한 마음만으로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평등한 세상에서 ‘선량한 차별주의자’가 되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익숙한 질서 너머의 세상을 상상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