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종이의 신 이야기

uragawa 2018. 11. 22. 10:58

종이라는 표현수단을 갖는 것은 하나의 언어를 획득하는 것과 똑같이 자유롭구나,



예를 들면 성냥갑 라벨, 우유병 뚜껑, 책갈피, 전단, 화장지 등의 포장지 같은 장기보존을 염두에 두지 않고 만들어진, 이른바 쓰고 버리는 인쇄물 종류를 ‘프린티드 에페메라’라고 한다. 에페메라는 ‘단명한’, ‘쓰고 버리는’이라는 의미가 있어서 번역해보면 ‘하루살이 인쇄물’. 오래전부터 있었던 인쇄용어다.



“좋아하는 종이는 뭡니까?”
“도쿄 올림픽 전에 변소(!)에서 쓰던 휴지와 옛날 만화 잡지에서 쓰던 종이.”



“색깔을 늘리면 늘릴수록 변명할 여지가 많아지는 것 같습니다. 설명할 여지가 없는 한 가지 색깔이라는 범주에서 얼마나 뛰어난 디자인을 해 낼 수 있는지가 관건이지요.”



“행복한 우연과 그리고 역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반드시 알아보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라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좇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가도 깨달았습니다.”



MARU 씨는 참 별난 사람이라 아틀리에에서 나랑 이야기를 하고 있는 동안에도 꼼지락꼼지락 쉬지 않고 손을 움직여 침낭맨을 꿰매고 있었어요. 이것도 뭔가 의미가 있는 겁니까. 하고 물었더니 의미는 없대요. 각자가 뭔가를 느껴주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보기에 흐뭇하고 그러면서도 발랄하고.



새로운 종이를 연구할 때 가장 어려운 것은 기술 이상으로 ‘콘셉트’라고 한다. 흰색이라면 어디까지가 흰색일까. 감촉, 질감. 단순한 색일수록 콘셉트가 정해지지 않으면 아예 추진이 되지 않는다.



“페이퍼리스라는 말이 회자되고, 최근에는 전자서적 등도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은 사진집을 50만 부씩 찍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하지만 ‘리틀프레스’는 늘고 있습니다. 인프라가 변하고 일반인이 잉크제트로 인쇄하는 시대가 되었잖습니까.”



“그렇습니다. 단순히 우표만 디자인하면 되는 게 아니라 일단 소재가 정해지면 교섭, 선정, 저작권 처리, 촬영이나 촬영물의 조달도 디자이너가 합니다. 제안에서부터 한 장의 우표가 완성되기까지 6개월이 걸립니다. 인쇄는 경쟁입찰이기 때문에 그 업무도 맡아서 처리합니다. 회의를 하거나 논리적으로 일을 추진해야 하는 작업도 적지 않습니다. 참고로 이 시리즈는 프랑스 인쇄회사가 인쇄하고 있습니다. 색 배합등의 교정을 할 때는 영어와 프랑스어가 여기저기서 튀어나와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오동나무 상자에 담은 ‘인간문화재 명함’은 옻칠한 상자까지 포함해서 35,640엔. 내가 만약 부자가 된다면 보석이나 자동차가 아니고 이런 것에 아낌없이 돈을 쓰는 사림이 되고 싶다.



편리한 디지털 도구는 얼마든지 있지만 적어도 자신의 일정 정도는 펜으로 써넣고 직접 만들어가고 싶다. ‘마감’ ‘디자인 업’이라고 써넣을 때마다 맛보는 작은 긴장감을 잊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