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모스크바의 신사

uragawa 2018. 11. 28. 21:33

비신스키 직업은?
로스토프 직업을 갖는 것은 신사의 일이 아닙니다.
비신스키 좋아요. 그럼 당신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죠?
로스토프 식사와 토론. 독서와 사색. 일상적인 잡다한 일들.
비신스키 시도 쓰죠?
로스토프 나는 깃펜으로 펜싱을 한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비신스키 [작은 책을 들고] 당신이 1913년에 발표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이 긴 시를 쓴 사람인가요?
로스토프 내가 썼다고들 하더군요.
비신스키 왜 그 시를 썼습니까?
로스토프 시가 절로 써진 겁니다. 시가 나오려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날 나는 그저 어느 특정한 날 아침에 특정한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참 이상한 일이야. 스위트룸을 포기할 준비가 되었을 때 백작의 머릿속에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친구나 가족과 헤어지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역에서 부모님이나 형제자매를 배웅한다. 사촌을 방문하고 학교에 입학하고 군대에 입대한다. 결혼을 하고 외국 여행을 한다. 우리는 끊임없이 가까운 사람의 어깨를 붙잡고서 그가 건강하게 잘 지내기를 바라고, 머잖아 그로부터 소식을 듣게 될 거라는 생각에서 위로를 받는다. 그것은 인간 경험의 일부인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동일한 결과에 도달한다

우리에게 원한을 품어 언제든 복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굴복함으로써 그들의 마음을 동정과 연민으로 향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그와는 완전히 반대되는 방법으로―대담하고 단호한 태도를 취하는 것도 때로는 같은 효과를 낸다…….



“예절은 사탕 같은 게 아니란다, 니나. 너한테 가장 잘 맞는 것들을 고를 수 있는 게 아니야. 그리고 반쯤 먹고 남은 것을 다시 상자 속에 집어넣을 순 없어…….”



백작은 의자에서 일어나 지하실에서 가져온 열 권의 책 가운데 가장 두꺼운 책을 집어 들었다. 사실 그 책은 그에게는 새로운 모험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그걸 읽을 필요가 있을까? 누가 그에게 향수병에 빠졌다거나 게으르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전에 두세 번 읽은 소설을 또 읽는다며 시간을 낭비한다고 비난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시대는 가차 없이 변한다. 필연적으로 변한다. 창의적으로 변한다. 그렇게 시대는 변하면서 케케묵은 경칭과 사냥용 호른뿐 아니라 은으로 만든 호출종과 자개를 입힌 오페라글라스, 그리고 이제는 쓰임새가 없어진 온갖 종류의 공들여 만든 물건들을 골동품으로 만들어버린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사교 범위가 점점 줄어드는 것은 슬프지만,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현실이지.” 그가 말했다. “습관에 의존하는 경향이 늘거나 아니면 활력이 주는 탓에 우리는 갑자기 몇몇 익숙한 사람들과만 사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단다. 그래서 나는 인생의 지금 단계에서 너처럼 멋진 새 친구를 만나게 된 것을 굉장한 행운으로 여겨.”



본질적으로 인간은 너무 변덕스럽고 너무 복잡하고 엄청나게 모순적이어서 우리가 숙고해야 할 뿐만 아니라 거듭 숙고해야 하는 존재다. 인간은 우리가 가능한 한 많은 상황에서 가능한 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며 겪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에 관한 견해를 보류하겠다는 확고한 결심이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남녀 간의 사랑에서 한발 앞서는 것은 부단한 경계심을 요하는 일이다. 앞서 이끌며 성공적으로 나아가고자 한다면 한 마디 한 마디를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고, 모든 몸놀림을 주의해야 하고, 모든 표정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달리 말하면 남녀 간의 사랑에서 한발 앞서는 것은 진이 빠지는 일인 것이다. 반대로 한발 뒤처지는 것은? 유혹당하는 것은? 음, 그것은 의자에 기대앉아 와인을 홀짝이며 상대의 질문에 머릿속에 맨 먼저 떠오른 생각을 그대로 말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백작 앞에 영광스럽고 웅장한 도시가 펼쳐져 있었다. 수많은 불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면서 빙빙 돌았으며 마침내 별들의 움직임과 한데 어우러졌다. 어지러운 한 영역에서 불빛과 별빛이 뒤섞여 돌았고, 그 때문에 인간의 작품과 하늘의 작품이 혼동되었다.



좋은 사람과 즐거운 대화를 나누며 즐거운 일에 빠져 있다 보면 시간이 정말 빨리 흐른다는 사실을 새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주방장은 자정을 30분 넘긴 지금, 태양은 내일도 빛날 것이고, 사람들은 대부분 근본적으로는 관대하며, 누가 뭐라고 해도 세상은 어쨌든 좋은 쪽으로 굴러가기 마련이라는 점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야기 속에서 죽음은 소리 없이 마을에 도착한 다음 여관에 방을 하나 잡고, 골목길에 잠복해 있거나 혹은 슬그머니 시장을 어슬렁거리지. 그러다가 주인공이 복잡한 일상으로부터 한숨 돌리려는 그 순간에 죽음은 그를 찾아가.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백작은 인정했다. 하지만 삶 역시 어느 모로 보나 죽음만큼이나 기만적이라는 사실을 얘기하는 스토리텔링은 거의 없지.



젊은 시절의 백작은 주위 사람의 존재에 결코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마음을 여는 친구가 되고자 노력했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을 때면 도중에 무슨 소리가 끼어들든 그걸 방해로 여기지 않았다. 사실 그는 주위에 약간의 소음이 있는 상태에서 책을 읽는 게 더 좋았다. 거리의 행상이 내지르는 소리도 좋고, 이웃한 아파트에서 나는 피아노 소리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계단에서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두 개 층을 급하게 뛰어 올라와서는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그의 문을 두드리고, 4두 마차를 몰고 온 두 친구가 지금 보도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숨 가쁘게 설명하는 소리—가 좋았다. (책에 페이지를 매긴 이유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타당한 이유로 책 읽기가 중단되었을 경우, 그 지점을 찾기 쉽게 해주려고 말이다.)



우리는 우리가 창조한 것을 파괴할 준비가 되어 있어. 우리는 어떤 나라의 국민들보다도 더 그림이나 시, 기도, 사람의 힘을 믿기 때문이지.



“우리가 모든 단추를 커다란 유리병 하나에 몽땅 담아놓는다면 세상이 더 좋아질까요? 그런 세상에서는 특정한 색깔의 단추를 집으려고 손을 넣을 때마다 의도와는 달리 손가락 끝이 불가피하게 그 단추를 다른 단추들 밑으로 밀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나중엔 그 단추가 보이지도 않게 될 거예요. 그러면 결국 화가 난 상태에서 모든 단추를 바닥에 쏟아붓겠지. 그러고 나서는 그걸 다시 주워 담느라 한 시간 반이나 되는 시간을 허비하게 될 거예요.”



인생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박수갈채를 받느냐 못 받느냐가 아니야. 중요한 건 우리가 환호를 받게 될 것인지의 여부가 불확실함에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용기를 지니고 있느냐, 하는 점이란다.



그렇지만 반드시 이유란 게 있어야 할까? 20년 전에 식사를 했던 모든 친구들과 여전히 식사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