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단단한 삶 - 나답게, 자립하고 성장하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uragawa 2018. 5. 28. 21:35

일본 사회는 ‘입장’으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나서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입장이라는 모빌슈트 mobile suit(일본의 로봇 애니메이션 ‘기동전사 건담 시리즈’에 나오는 인간형 기동병기의 명칭) 같은 것으로 몸을 감싸고 입장에 따라서 행동하고 의사소통을 하는 실로 숨 막히는 사회입니다. 이는 회사와 학교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만연해 있습니다.
한편 한국은 ‘부모 자식’, ‘형제’, ‘부부’, ‘친구’, ‘선후배’ 같은 인간 사이의 관계가 강력한 지배력을 발휘해 개인의 프라이버시 같은 경계를 가볍게 뛰어넘고 엉겨 붙어서, 서로 침범하고 바닥을 알 수 없는 늪처럼 끌어당기는 숨 막히는 사회라고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진흙탕사회’라고 부른다고요.



친구는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하는 관계의 사람을 가리킨다.

자신보다 지위가 높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도 대등하게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그는 친구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대등’이란 반말을 하는 관계가 아닙니다.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에게 그러는 것은 실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한다는 의미 입니다.
인간으로서 서로 존중한다는 것은 상대가 생각하는 것과 느끼는 것을 올바르게 인식할 수 있도록 서로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다는 뜻입니다. 혼자서 상대에 관해서 자기 마음대로 상을 만들어 강요하는 행동은 상대에게 굴욕감을 줍니다.



‘불안’은 ‘공포’보다 다루기 어렵습니다. 공포는 대상이 확실한 데 비해 불안은 대상이 모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은 대상이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그 대상을 스스로 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지요.
예를 들면 당신이 누군가에게서 위협을 당해 폭력적으로 뭔가를 강요당한다고 합시다. 그런 일을 당하면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사람은 종종 겁에 질려 그렇게 강요하는 사람이 ‘나를 위해’ 그런다고 믿어 합리화하려고 하고 ‘나쁜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무섭다’, ‘싫다’는 기분은 남고 그 원인인 폭력적 강요는 ‘옳은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스스로에게 일러 주면 당신은 원인을 모르는 공포에 갇히게 됩니다. 이것이 불안입니다.



자기애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타인의 장점을 욕망하는 것이 집착이다.

이러한 타인의 장점을 갈취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은 실로 위험한데 참으로 무섭게도 어디서든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부모와 자식 사이에서 잘 볼 수 있습니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아이를 사랑하지 않고 아이에게 집착합니다. 집착당하고 자란 아이는 다른 사람에게 집착하게 됩니다. 
이런 유혀의 집착의 가장 알기 쉬운 예가 결혼 준비 입니다. 결혼 준비에 쓰이는 말 중에 ‘스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스펙’은 결혼 상대를 사회적 지위, 소득, 연령, 신장, 체중, 가사노동 부담 능력 등의 항목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사고하는 사람은 실은 사람과 결혼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장점을 소유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순전히 집착만 하는 사람은 소수입니다. 마찬가지로 순전히 애정만 갖고 있는 사람도 소수입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집착과 애정 양면을 갖고 있습니다. 그 결과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은 주로 집착과 애정 사이의 갈등으로 귀결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아도 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버리면 살아갈 수 없게 됩니다.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하나하나 확인하고 그중에서 정말로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는 것을 일상의 삶에서 판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필요하지 않은 것은 용기를 내어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을 홀가분하게 만드는 것이 자기혐오에서 빠져 나오는 길로 연결 됩니다.



인간관계는 날것이라서 부패하기 쉽습니다. 아무리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라도 자그마한 일이 계기가 되어 상대가 점점 싫어지고 질리는 경우가 빈번하게 일어납니다. 이것이 ‘악연’이라는 녀석입니다.



자신이 자립하지 않아 부자유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종종 이 ‘선택의 자유’를 손에 넣어 자립을 확보하려고 합니다. 지금은 이렇게 굴욕적인 상태에 있지만 출세해서 혹은 돈을 손에 넣어 자립하면, 자유로운 인간이 되어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고 하고 싶은 것을 하리라 생각 합니다.



그런데 인생에서 선택은 어느 쪽이 정답인지 모릅니다. 이 ‘모름’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문제없습니다. 그러나 ‘정답을 모른다’는 것에 불안을 느끼면 냉정을 잃게 됩니다. 냉정을 잃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생각해도 소용이 없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결말을 맺게 됩니다.
혹은 반대로 어느 쪽 선택지를 ‘정답’이라고 믿어 버려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답이 없는 곳에 정답을 설정하면 문제가 됩니다. 설정된 정답이 옳다고 믿어 버리는 것은 냉정을 잃었다는 뜻입니다.



자신이 자립하고 있지 않아서 자유롭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은 무엇보다도 먼저 타인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곤란을 겪고 있을 때 도와줄 사람을 한 명이라도 늘리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 관계는 ‘주어야 받는’give and take 관계가 아닙니다. 주어야 받는 관계는 주지 않으면 도움을 받지 못하고 정말로 곤란해져 자신이 줄 것이 없을 때는 버림받고 맙니다. 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도 곤란을 겪고 있으면 도움을 줄 친구, 그런 친구를 만들어야 합니다.



꿈은 즐겁게 꾸는 것이지 비장한 결의로 꾸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식으로 필사적이 되면 세상일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법입니다. 그럼에도 꿈을 이미지화하고 꿈을 위해 자기 자신을 움직이는 데에는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감을 갖고 자신의 정신을 자유롭게 펼칠 때만 뭔가 진짜 의미 있는 것을 만들어 냅니다. 현대 사회의 문제는 가치 기준이 뒤틀려 있어서 그런 가치를 가치로서 인정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 대신에 ‘재능 있는 아이’가 초조에 시달려서 토해 낸 것을 칭송합니다.



“장기적으로 생각해라”라든지 “장기적인 안목을 갖고 봐라”라고 말하며 참으라고 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인간의 감각에는 장기적인 시야가 이미 들어 있습니다. 대체로 ‘왠지 모르지만 싫은 느낌이 든다’ 같은 경우에는 ‘나쁜 예감’ 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럴 때 인간의 직감에는 대개 머리로 일일이 계산하는 ‘장기적 시야’ 같은 것을 훨씬 넘어서는 깊은 계산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나쁜 예감이 들면 설령 눈에 보이는 것이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오랫동안 동경한 것이라도 결코 가까이 가서는 안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