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빙평선

uragawa 2018. 6. 12. 21:01

하늘과 대지 사이에서 개미처럼 좀스럽게 살다 보면 마음까지 대자연에 짓눌리는 듯한 느낌이 든다. 베어낸 목초와 똑같이 서서히 발효해 양분도 불어나고 이윽고는 퇴비가 된다. 다쓰로는 몸의 깊은 안쪽부터 썩어서 흙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한 마음이 들었다. 그에게 산다는 것은 더 이상 자신의 의지가 아니었다. 파산 면책을 받은 시점에 함께 상실해 버린 뭔가가 있었다.
- 설충 中



“나는 사랑과 일 중에서 어느 쪽인가를 선택해야 할 때는 둘 다 내버리고 싶어져. 그래서 항상 양쪽 다 확실하게 손에 넣을 방법만 생각하려고 해.”



결혼과 이혼을 거쳐 마흔을 코앞에 두고 보니, 힘겨울 때 혼자서 뚫고 나가겠다는 각오만 단단히 해두면 의외로 힘든 일 따위 찾아오지 않는 법이라는 것도 차츰 알게 되었다. 액운도 재앙도 남에게 의지하려는 마음이 불러들이는 거야. 이제야 그것이 어머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었다는 게 생각났다.



“마키 씨, 좋은 여자란 평생 주인공은 될 수가 없어. 주인공은 언제든 어리석은 여자야. 잘 기억해둬.”
“칭찬해주시는 건가요?”
“이런 바보, 내 자랑을 한거야.”
-안개 고치 中



남의 집 밥을 먹고산다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을 죽이는 훈련을 한다는 것이다. 열다섯 살 때부터 여태까지 가능한 한 자신을 드러내지 않도록 노력하며 살아왔다. 덕분에 하루 하루 큰 변화가 없는 대신에 무언가 큰 상처를 입는 일도 없었다. 스승이 이르는 말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고분고분함과 어떤 종류의 고집, 그리고 한 없는 자부심이 한 명의 직인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기네코는 손안에 넣었다고 생각한 순간에 스르르 팔을 빼 버리고 게이스케가 이제는 내팽개치자고 생각하자마자 마치 그때를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살을 맞대왔다.
-바다로 돌아가다 中



주위와 어울리지 못하게 된 게 외롭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때라도 항상 발붙일 데 없이 붕 떠 있는 듯한 느낌은 피할 수 없었다. 미더운 데 없이 흐늘흐늘 내리는 눈이 공연히 마음을 더 울적하게 만들었다.



몸을 돌려 방 안을 둘러보았다. 벽만 두드러지는 살풍경한 공간 한 구석에 세미더블 침대가 덜렁 놓여 있었다. 거실 양쪽에 있는 다다미방은 장지문을 닫고 옷장 겸 창고로 썼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을 것을 전제로 집 안의 가구며 물건을 배치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남의 눈 따위는 의식할 것 없이 주방과 거실과 침실이 하나가 된 공간은 무엇이든 금세 손이 닿는 비행기 조종실 같았다. 혼자 뿐이라는 외로움을 온몸으로 풍풍 풍겨가며 천천히 익숙해지는 수밖에 없다.



가고 싶은 곳도, 보고 싶은 곳도 모두 내 마음대로다. 호수를 바라보며 편의점에서 사 온 도시락을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는 가와유에 들러 온천욕을 즐기고 오자. 이것저것 계획을 짜나갔다. 얽매일 것 없는 생활은 일단 외롭다고 생각하기 시작하면 한 이 없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호수 위 하늘에서 유난히 반짝이는 별 두 개가 거울처럼 반들거리는 물에 비치고 있었다. 서로 다가갈 수도 없고 멀어질 수도 없다. 별들의 고요한 만남을 료코는 숨을 죽이고 응시했다. 단 한 마디라도 내뱉으면 별빛이 순식간에 지워질 것 같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미안할 만큼 고요한 가운데 어둠 속에 녹아든 호수의 윤곽을 찾아보았다. 물에 뜬 두 개의 별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물의 관 中



실제로 죽이는 것과 살아 있는 인간을 없는 것으로 치고 살아가는 것에 무슨 차이가 있을까. 가슴 안쪽에 아픔이 내달려 두 팔로 억눌렀다. 
-빙평선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