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양과 강철의 숲

uragawa 2017. 2. 16. 22:18

피아노로 무엇을 하려는 것일까. 물어보면 안 된다. 물어보는 행위에는 책임이 따른다. 물어보고 대답을 들으면 다시 한 번 이쪽에서 무언가를 되돌려줘야만 할 것 같았다. 질문은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으나 형태를 이루지 못했다. 아마 되돌려줄 무언가가 내게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도 ‘올바름’과 마찬가지로 내게는 새로운 단어였다. 피아노와 만나기 전까지는 아름다움을 깨닫지 못했다. 몰랐다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 나는 많이 알고 있었다. 그저 알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희미하게 밝아지는 나뭇가지나 그 후에 일제히 움트는 어린잎이 아름답다는 사실, 동시에 그것들이 당연히 거기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럽게 놀랐다. 당연하면서도 기적 같았다. 분명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세상 모든 곳에 아름다움이 숨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아름다움을 깨달았다. 예를 들어 방과 후 고등학교 체육관에서.
피아노가 어딘가에 녹아든 아름다움을 꺼내어 귀에 들리게 해주는 기적이라면 나는 기쁘게 피아노의 종이 되리라.



많은 것을 포기해왔다. 산속 외진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도 않았다. 산 아랫마을에 사는 아이들은 당연하게 누리는 혜택이 내게는 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포기하겠다는 명확한 의사가 없었어도 수많은 것을 그저 지나칠 수 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괴롭지는 않았다. 애초에 바라지 않은 것은 아무리 갖지 못해도 괴롭지 않다. 눈에 보이는 곳에 있는데, 갈망하는데, 내 손에 들어오지 못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으로 괴롭다.



집에서는 어디에 있어도 영 편하지 않았다. 특히 남동생이 생글생글 웃으며 엄마나 할머니와 말하고 있을 때면 나도 모르게 혼자 뒷문으로 빠져나와 밖으로 나갔다. 뒷마당에서 바로 연결된 숲을 정처 없이 걸으며 숲의 진한 냄새를 맡고 나무 잎사귀들이 스치는 소리를 듣다 보면 서서히 감정이 정리되었다. 어디에 있으면 좋을지 모르겠는, 어디에 있어도 침착해지지 못하는 위화감은 흙과 풀을 밟는 감촉과 나무 저 높은 곳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나 멀리서 들리는 짐승 소리를 듣다 보면 사라졌다. 혼자 걷고 있을 때만큼은 다 괜찮다고 느꼈다.



“가끔 생각하는데, 너는 무욕이라는 껍질을 뒤집어 썼으면서 사실은 무지막지하게 욕심쟁이 인 거 아냐?”



“재능이란 무지막지하게 좋아하는 감정이 아닐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대상에서 떨어지지 않는 집념이나 투지나, 그 비슷한 무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해.”



길이 험준하다. 저 앞까지 너무 멀어서 어떻게 노력해야 하는지조차 보이지 않는다. 처음은 의지. 마지막도 의지. 그 사이에 있는 것은 분발이나 노력이거나, 혹은 분발도 노력도 아닌 다른 무언가이거나.



“조율은 어떻게 하면 좋아질까요.”
혼잣말이었다. 자리로 돌아오면서 무심코 말했나 보다.
“일단 1만 시간이래.”
그 말에 뒤를 돌아보자 기타가와 씨가 나를 보고 있었다.
“어떤 일이든 1만 시간을 투자하면 그럴싸해진다더라. 고민하고 싶으면 1만 시간을 투자한 후에 고민하면 돼.”
1만 시간이 얼마나 되는 세월인지 멍하니 계산했다.
“대충 5,6년 아닐까?”



결혼이 그렇게 경사스러운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뻐하는 야나기 씨를 보니까 좋았다. 행복하시라는 말이 떠오르지 않아서 축하한다고 말한 다음에는 그저 묵묵히 야나기 씨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쩌면 이 길이 틀리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시간이 걸려도, 빙 돌아가도, 이 길을 가면 된다. 이무것도 없다고 생각한 숲에,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던 풍경 속에, 모든 것이 있었다. 숨겨져 있지도 않고, 그저 발견하지 못했을 뿐이다.
안심해도 좋았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더라도, 아름다움과 음악은 원래 이 세계에 녹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