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변호 측 증인

uragawa 2013. 3. 14. 08:30

지금 생각하면 그 서약 문구를 만들어낸 사람은 그리 섬세한 타입은 아니다 싶다.목사가 남편에게 나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느냐고,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애정과 경의로써 아내를 대하겠느냐고 물었을 때도 나는 남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심하게 긴장한 상태였을뿐더러, 무엇보다도 다음은 목사의 물음에 내가 답할 차례라는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꽉 차 그의 얼굴을 올려다 볼 여유가 없었다.

목사는 우리에게 형식에 따라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라는 표현으로 영원을 맹세케 했는데, 이 ‘죽음’이란 대체 누구의 죽음을 의미하는가?




지금까지 자기가 얼마만큼 인생을 요령 있게 살아왔는지 미미 로이는 멍하니 생각해 보았다.




스기히코 부인은 노부의 표정에 단순한 의례적인 사양과는 다른 미묘한 주저가 어린 것을 바로 알아차렸다. 그새 감이 퍽 좋아졌다. 이 집에 온 뒤로 그녀는 이미 여러가지를 배웠다. 앞으로도 여러가지를 배워야 할 것이다. 인간은 늘 공부를 해야 한다.




“그야 나도 욕심은 있어. 행복해지고 싶다는 큰 욕심이.”

행복이란 정말 좋은 것이다! 그녀가 지금까지 맛본 것 같은 불행은 이제 두 번 다시 사절이다.




잘 쓴 살인 이야기나 범죄 이야기에는 묘하게 사람을 도취시키는, 가슴 설레게 하는 뭔가가 있게 마련이다. 절대로 덤벼들지 못할 우리 속의 맹수를 구경할 때 처럼.




하지만 그 여자는 사람한테 각각 타고난 분수란 게 있다는 걸 알아야 해. 그 여자는 자기 분수를 모른 거야. 미소나 달콤한 말이 어리석은 사내들 마음을 녹이듯, 그 여자는 사람의 분수를 녹여서 그 경계를 넘을 수 있다고 생각해. 하지만 그 여자는 우리 세계에 들어올 수 없어. 들어와선 안되는 거야.




그이의 시선엔 제가 이해할 수 없는 뭔가, 제가 모르는 뭔가, 저랑은 동떨어져 있는 뭔가가 있었습니다. 그건 타인에게만, 저랑은 아무 연이 없는 머나먼 사람에게만 가능한 시선이었어요. 그이가 그런 눈으로 절 본 건 저희가 처음 만난 이래로 처음이었어요.




그는 6월이 싫었다. 6월의 습기와 꾸물거리는 더위가 싫었다. 양달에서 머리를 무겁게 늘어뜨린 수국의 색 바랜 꽃 덩어리며 잔디의 숨 막히는 훈김이 싫었다.

특히 6월의 살인사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그렇다고 딱히 몇 월의 살인시건은 마음에 든다는 뜻은 아니었다).




누가 죽였건 상관없다. 되도록 기상천외한, 깜짝 놀라 범인이면 좋겠다. 아니면 교도소에 가도 싼 불쾌한 인물이 범인이면 좋겠다.




낡은 테이블 위의 햇빛이 엷어졌다.

우리 세 사람이 앉아 있는 작고 살풍경한 방에 황혼이 스며들었다.

이 방에 황혼의 빛이, 오래된 유화에 곧잘 등장하는 누렇게 물든 나뭇잎 색과 비슷한 그 향수 어린 빛이 비친다는 것이 나에게는 일종의 도착倒錯처럼 느껴졌다. 낮이 가고 밤이 온다. 이윽고 어둠이 찾아 들텐데, 나는 어쩐지 그 반대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지금은 밤.

저 창문으로 비쳐드는 것은 새벽의 빛.

나는 지금 암흑이 옷을 벗어 던지고 여명으로 가는 그 어슴푸레함의 선상에 서 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들었다. 나는 긴긴 밤의 어둠 마지막 한 조각 위에 있었다. 이 밤은 너무나도 긴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