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사람의 아이들

uragawa 2020. 10. 26. 22:30

나는 지금도 옥스퍼드의 봄날이 품은 눈부신 빛에서, 매년 더욱 사랑스럽게 피어나는 밸브로턴 거리의 만개한 꽃들에서, 돌담 위를 어른거리는 햇살에서, 바람결에 무성한 잎을 뒤채는 마로니에 나무에서, 꽃을 피운 콩밭의 향기에서, 첫 꽃망울을 틔운 설강화의 자태에서,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아담하게 피어난 튤립에서 즐거움을 찾는다. 이는 감각적이라기보다 지적인 즐거움이다. 인간의 눈길이 지켜보지 않아도 수백 년 동안 봄은 올 것이고 꽃은 필 것이다. 담장은 무너질 것이고 나무는 죽어 썩어갈 것이며 뜰에는 잡초가 우거질 것이다. 이 모든 아름다움은 그 모습을 기록하고 즐기고 축하할 인간의 지성보다 더 오래 살 것이므로, 내가 지금 느끼는 즐거움은 애틋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흔히들 매력을 무시하는데, 나로선 그 이유를 전혀 이해할 수가 없다. 다른 사람을 진심으로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 매력이 있을 리가 없다. 적어도 함께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에라도 상대방을 정말로 좋아할 수 있어야 한다. 매력은 언제나 진짜다. 매력은 피상적일 수는 있어도 가짜는 아니다.



근래 처음으로 아버지를 생각했는데 떠오르는 형용사가 솔직히 전혀 없었다. ‘다정했다’든지 ‘친절했다’든지 ‘영리했다’든지 ‘사랑했다’ 같은 흔한 말조차도. 어쩌면 내가 몰랐을 뿐, 아버지는 이런 속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아버지에 대해 아는 거라곤 죽어가고 있었다는 사실뿐이다. 아버지의 암은 빠르게 진행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수월하게 지나가지도 않았다. (하긴 수월하게 지나가는 암이 어디 있겠는가?) 아버지는 3년 가까이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의 죽음을 보고 듣고 냄새를 맡으며 지낸 그 3년이 내 어린 시절의 대부분 같다.



테오가 기억하기로 2천 파운드가 훌쩍 넘는 더 비싼 인형들은 크기도 다양해서 신생아 인형, 6개월 인형, 한 살 인형 등 선택할 수 있었고 정교한 동력 장치를 집어넣어 서거나 걸을 수 있게 만든 18개월 인형도 있었다. 당시 ‘여섯 달배기’라고 불리던 인형이 기억났다. 한때는 유모차를 끌고 가는 유사 엄마 무리를 만나지 않고서는 하이스트리트를 지나갈 수가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유사 출산도 존재했고, 인형이 망가지면 장례식을 치르고 축성한 땅에 묻어주던 일도 있었다. 2000년대 초반 기독교계에서는 교회가 이러한 가식 행위에 이용되는 게 과연 적법한가, 심지어 사제서품을 받은 성직자마저 이런 의식에 참석해도 되는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십자가란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잔혹성과 관료집단의 야만적 작태에 대한 수치의 상징이 아니었던가.



음식은 금세 나왔는데 먼저 나온 수프는 버섯과 닭고기 수프를 섞어놓고 파슬리를 뿌린 것이었다. 뜨거웠지만 놀랍도록 맛이 있었다. 곁들여 나온 버터롤빵도 신선했다. 이어서 허브 오믈렛이 나왔다. 여자는 차나 커피, 코코아 중 어떤 것을 들겠느냐고 물었다. 그가 원한 것은 술이었지만 팔지 않을 것 같았다.



지난 넉 달 동안 손님이 한 명도 없었거든요. 그러면 누구나 자신이 너무 쓸모없다는 생각이 들잖아요. 나이 들어서 쓸모없다는 느낌보다 더 나쁜 일은 없답니다. 그래서 저는 소용이 있든 없든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달라고 기도했어요. 그러자 그분이 손님을 보내주셨죠. 진짜 어려움에 부닥치면 손님은 어떻게 하시는지 모르지만, 저는 너무 커 보이는 어려움에 직면하면 ‘오직 구하라, 그러면 그분께서 응답해주시리라’라는 말을 믿는답니다.



스스로 구경꾼의 자리에 머물면 얼마간의 품위와 상당한 안전을 확보할 수 있다.



나는 낙서란 원래 스트레스가 별로 없다는 표시이자, 다른 사람과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하려는 유용한 방편이며, 계속 손을 놀리지 않으면 안 되는 일종의 욕구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마틴의 낙서는 특이했다. 그는 오히려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어서 낙서한다는 인상을 주었다. 그는 한쪽 정신으로 회의를 듣고 나머지 한쪽으로는 종이에 자기 나름의 전선과 기동작전 계획을 구상할 줄 알았다. 게다가 보통 군인들을 나폴레옹 전쟁 당시 군복을 입은 장난감 병정의 모습으로 꼼꼼하게 그렸다. 회의장을 나갈 때 낙서한 종이를 테이블에 두고 가곤 했는데, 나는 그 능숙하고 세밀한 그림에 매우 놀랐다. 나는 마틴을 좋아하는 편이었다. 한결같이 깍듯하게 나를 대했고 은밀하게 적대감을 드러낸 적도 없어서였다.



마틴이 낙서에서 눈도 들지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우린 모두 혼자 죽어요. 한때 탄생을 견뎌냈듯이 죽음도 견뎌내는 겁니다. 두 경험 모두 남과 함께 나눌 수는 없어요.”



강탈, 강도, 위협, 학대, 착취를 선택한 사람은 똑같은 심보를 지닌 사람들과 함께 살아야 해요. 그들이 바라는 사회가 그런 거라면 그런 사회를 주면 됩니다. 그 안에 어떤 식으로 미덕이 있다면 자기들끼리 분별력 있게 조직하고 평화롭게 살아가겠죠. 그렇지 않다면 그 사회는 그들이 남에게 그토록 떠안기고 싶어 하던 거대한 혼란 속으로 떨어져 내릴 겁니다. 선택은 전적으로 그들 몫이에요.”



사람들은 범죄와 폭력 행위에 충분히 시달렸습니다. 이젠 공포에 시달리며 살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아요. 박사는 1971년에 태어났죠? 그렇다면 1990년대를 기억하겠군요. 여자들은 자기가 사는 도시의 거리도 두려워하며 걸어 다녔어요. 성범죄와 폭력범죄가 기승을 부렸고, 노인들은 자기 아파트를 감옥 삼아 감금 생활을 했죠. 일부는 창살에 갇혀 불에 타 죽기도 하고요. 술에 취한 훌리건이 시골 마을의 평화를 파괴했고 심지어 어린아이들도 어른들만큼이나 위험했어요. 값비싼 경보장치와 방범용 창살을 두르지 않은 금고가 없을 정도였죠.



이상하지 않아? 현대의학 대부분이 노인의 건강 향상과 인간의 수명 연장에 헌신하고 있는데 치매 환자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늘고 있어. 그런 상태에서 수명을 늘려서 어쩌자는 건지. 우린 단기기억을 향상하기 위해 약을 주고, 기분을 좋게 해주려고 약을 주고, 또 식욕을 돋우려고 약을 주지. 잠들기 위한 약은 필요 없어. 내내 자는 것처럼 보이니까.



한배에서 새끼가 여러 마리 태어날 경우 슬픔으로 얼룩지는 일도 없지는 않았다. 다산하는 반려동물에 관한 규제는 엄격하고 철저했다. 이제 마틸다는 불임수술을 받아야 하고 헬레나와 루퍼트 부부는 한배에서 태어난 새끼 가운데 암컷 한 마리만 키울 수 있었다. 아니면 마틸다에게 한 번 더 출산을 허락하는 대신 새로 태어난 새끼는 수컷 한 마리를 제외하고 모두 안락사를 시켜야 했다.



누군가는 임신의 공포가 영원히 사라지면 피임약이나 콘돔, 배란주기 계산법같이 성욕을 잠재우는 피임법이 더 이상 필요 없어져 섹스가 자유롭고 새롭고 독창적인 기쁨이 될 거라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막상 현실이 닥치니 정반대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정상적으로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조차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아이를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이다. 출산과 완전히 결별한 섹스는 거의 무의미한 곡예가 되고 말았다. 여자들은 ‘고통스러운 오르가슴’이라고 표현하며 불만을 제기했다. 경련은 있었지만 더 이상 희열은 아니었다. 여성잡지마다 지면을 할애하여 이 공통의 현상을 다루었다. 1980년대와 90년대 내내 남성을 향한 여성의 참을 수 없는 비판의 목소리가 점점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마침내 수백 년간 쌓여온 울분이 지극히 정당했다는 감히 맞설 수 없는 근거를 획득했다. ‘더 이상 남성에게 아이를 낳아줄 수 없는 우리 여성은 쾌락도 주지 않을 것이다.’ 섹스가 여전히 서로의 위안이 될 수는 있겠지만, 서로의 희열이 되긴 어려웠다. 정부에서 후원하는 포르노 상점이 생기고 문학이 점점 외설적이 되어갔지만, 욕망을 자극하기 위한 온갖 제도적 장치 중 그 어떤 것도 효과가 없었다.



일기를 쓰기 시작했던 것도 삶을 기록하기 위해서라기보다(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어떤 삶을 기록한단 말인가?) 지난날을 이해하고자 하는 수단이자 규칙적이고 제멋대로인 탐험으로 삼으려고 했던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를 느끼려는, 또 한편으로는 마음을 편안하게 어루만지려는 긍정적 행위였다. 일기 쓰기는 어느새 그의 삶에서 일상이 되어버렸는데, 자꾸 자기검열을 해야 하고 중요한 내용을 누락시켜야 하고 명백히 밝히지 못하고 사실을 속여야 한다면 아무런 의미도 없는 행위가 되고 말 것이다.



생각이 한 바퀴 돌아 원점으로 돌아오자 테오는 처음으로 낯선 외로움을 느꼈다. 외로움은 그에겐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는 그 감정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분노하기까지 했다. 텅 빈 거리를 내려다보며 난생처음 간절하게, 모든 이야기를 털어놓을 수 있는 믿을 만한 친구가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다.



테오는 부엌에서 저녁으로 먹을 샐러드에 드레싱으로, 올리브오일과 와인식초를 알맞은 비율로 넣고 조심스럽게 섞고 있던 참이었다.



오메가 이후 온 나라가 무관심과 냉담에 빠지고, 아무도 일하기를 원하지 않고, 공공서비스도 거의 중단되고, 범죄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면서 희망과 야망이 영영 사라져버리자, 잉글랜드는 그가 손을 내밀어 따기만 하면 되는 잘 익은 자두가 되어버렸다. 진부한 상징이지만 이보다 정확한 비유는 없을 것이다. 자두는 지나치게 익어 썩어가는 상태로 가지에 매달려있었고 잰은 그저 손만 뻗으면 되었다.



머릿속에 절규가 들려왔다. 그래,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이기적인 아들이 되려고 했던 것도 아니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아버지가 되려고 했던 것도 아니야. 나쁜 남편이 될 생각도 없었어. 나란 인간이 뭐라도 일부러 그런 적이 있기나 했나? 오, 하느님. 내가 일부러 그러겠다고 마음을 먹는다면 무슨 짓인들 저지르지 못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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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이들
The Children of Men(1992)



리디북스에서 90일 대여한 책.
작가님 유일한 sf 작품

어휴, 역시 진도가 빨리 빨리는 안 나간다 ㅋㅋ
다 읽는 데 거의 한 달 걸렸네

더 이상 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세계라니...
아니, 도망치는 씬에서도 읽는데 졸려우면 어찌하냐고요

이제 이거 읽었으니 영화 봐도 되는가?ㅋㅋㅋ



+
나에겐 아직 리디에서 작가님의 책을 한 권 더 대여해둔 상태인데,
진도 나갈 수 있겠냐 ㅋㅋㅋㅋㅋㅋ




2020/08/20 - [한밤의도서관] - 여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직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