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물의 마지막 예(例)가 사라지면 그와 더불어 그 범주도 사라진다. 불을 끄고 사라져버린다. 당신 주위를 돌아보라. ‘늘’이라는 것은 긴 시간이다. 하지만 소년은 남자가 아는 것을 알았다. ‘늘’이라는 것은 결코 시간이 아니라는 것을.
그는 회색 빛 속으로 걸어나가 우뚝 서서 순간적으로 세상의 절대적 진실을 보았다. 유언 없는 지구의 차갑고 무자비한 회전. 사정없는 어둠. 눈먼 개들처럼 달려가는 태양. 모든 것을 빨아들여 소멸시키는 시커먼 우주. 그리고 쫓겨다니며 몸을 숨긴 여우들처럼 어딘가에서 떨고 있는 두 짐승. 빌려온 시간과 빌려온 세계 그리고 그것을 애달파하는 빌려온 눈(目).
남자는 자신이 아무런 근거 없이 희망을 걸고 있음을 알았다.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더 어두워지고 있다는 걸 잘 알면서도 그곳은 더 밝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초승달처럼 둥글게 휜 해변을 따라 걸어갔다. 조수에 밀려온 해초들 밑의 단단한 모래를 딛고 걸었다. 이윽고 그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옷이 부드럽게 펄럭거렸다. 잿빛 더께가 덮인 채 둥둥 떠 있는 유리 부유물, 바닷새들의 뼈. 실로 짠 매트 같은 잡초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물고기 뼈들이 조수가 밀려드는 해안을 따라 눈이 닿는 곳까지 뻗어 있었다. 죽음의 등사습곡 같았다. 하나의 거대한 소금 무덤. 의미 없는. 아무런 의미 없는.
매일매일이 거짓말이야.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넌 죽어가고 있어. 그건 거짓말이 아니야.
남자는 계속 기침을 했고 소년은 남자가 침을 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비틀비틀 걸어갔다. 넝마를 걸친 채 더럽게, 희망도 없이. 남자는 걸음을 멈추고 카트에 몸을 기대면 소년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눈물이 그렁해진 눈을 들어 소년이 거기 길에 서서 어떤 상상할 수 없는 미래로부터 자신을 돌아보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그 광야에서 장막처럼 빛을 발하는 소년.
어쩌면 세상의 파괴에서 비로소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바다, 산. 사물들이 존재를 멈추는 지루하고 보잘것없는 광경. 수종(水腫)같은, 비정하게 세속적인 너른 광야, 그리고 정적.
로드
The Road (2006)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다 드디어 도서관에서 빌려보았다.
(2권 있었는데, 책 엄청 깨끗하더라 ㅋㅋ 이 작가 분 건 다들 안 읽나 봐?)
근데 읽는 내내 도망치고 싶은 기분이어서
1주 연장하고 3주 만에 다 읽음.
휴, [핏빛 자오선]도 이렇게 오래 읽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ㅋㅋ
+
읽는 내내 조금 불편했던 건
자신의 생이 얼마 안 남았고 폐허가 된 세상 안에 아들과 단 둘이라면
아들이 혼자 살아갈 수 있도록 뭔가 알려주는 게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는 나님의 현실을 바라보는 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소설을 구상하게 된 계기
일흔이 넘은 매카시에게는 열 살이 안 된 아들이 있는데, 몇 년 전 함께 엘파소의 어느 호텔에 묵게 되었다. 매카시는 아들이 잠든 사이에 마을을 내려다보다가 오십 년이나 백 년 후에는 이 마을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상상에 빠져들었고, 거의 머릿속에는 산 위에 불길이 치솟아 오르고 모든 것들이 다 타버린 이미지가 떠올랐다.
대단하시다
70 넘었는데 열 살 안 된 아들 있는 거 실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