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플라워 문

uragawa 2019. 3. 6. 23:01

미국이 독립한 뒤 오랫동안 국민들은 경찰국 창설에 반대했다. 경찰이 시민을 억압하는 세력이 될까 우려한 탓이었다. 대신 시민들은 범죄가 발생했을 때 직접 나서서 용의자를 추적했다.



이 학교의 가르침은 몰리를 백인사회에 동화시켜, 당국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여성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다른 학교에 다니는 오세이지족 소년들이 농사와 목공을 배우는 동안, 몰리는 바느질, 빵 만들기, 세탁 등 ‘살림의 기술’을 배웠다. “인디언 소녀들을 세심하게 교육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루 말할 수 없다.” 미국 정부 관리의 말이다. 그는 이런 말을 덧붙였다. “남자가 근면하게 열심히 일해서 식구들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마련해주더라도, 아내가 요리를 할 줄 모르고 바느질에 익숙하지 않고 깔끔하게 정돈하는 습관이 없어서 즐겁고 행복해야 할 가정을 더럽고 불결한 곳으로 만들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 이교도의 의식과 미신에 끈질기게 집착하며 그 가르침을 자녀들에게 전달하는 사람이 바로 여자들이다.”



미국 정부는 많은 오세이지족이 돈을 관리할 능력이 없다면서, 부족민 중에서 그들의 신탁기금을 관리한 능력이 있는 사람을 가려내라고 인디언실에 요구했다. 부족이 격렬히 반대했으나 리지와 애나를 포함한 많은 오세이지족이 “재산관리 능력이 없는 사람”으로 판정되어서, 인근의 백인을 후견인으로 지정해 구멍가게에서 치약 하나를 사는 일에 이르기까지 모든 지출에 대한 감독과 승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감식방법을 배운 검사의도 없고 감식을 담당할 기관도 없는 오세이지 카운티 같은 곳에서는 독살이야말로 완벽한 살인방법이었다. 독약은 약국이나 식료품점에서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총을 이용할 때와 달리,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독에 중독되었을 때 나타나는 증상 또한 자연스러운 질병과 비슷한 경우가 많았다. 구토와 설사는 콜레라 증상과 비슷하고, 경련은 심장발작 환자와 비슷한 식이었다. 금주법 시대에는 메틸알코올을 비롯한 여러 독성물질로 만든 밀주 위스키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으므로, 밀주를 마시는 누군가의 잔에 살인자가 독을 첨가하더라도 전혀 의심받지 않고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전국적인 간행물인 <리터러리 다이제스트>는 “오세이지족의 ‘검은 저주’”라는 표현을 쓰면서, 이 부족 사람들이 “인적 드문 풀밭에서 총에 맞거나, 자동차 안에 앉아 있다가 쇠기둥에 찔리거나, 독에 중독되어 서서히 죽어가거나, 집에서 자다가 다이터마이트에 날아갔다.”고 보도했다. 기사는 계속 이어졌다. “저주는 계속된다. 저주가 어디에서 끝날지는 아무도 알지 못한다.” 1인당 소득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살해당하고 있었다.



톰은 때로 ‘합벅적인 살인’이라고 불리는 사형제도에 점점 반대하게 되었다. 그가 보기에 법은 다른 사람들의 폭력적인 충동뿐만 아니라 각자 자신 안의 폭력적인 충동 또한 제압하려는 몸부림이었다.



오세이지족이 석유로 벌어들이는 돈의 흐름을 조사할수록, 화이트는 겹겹이 쌓인 부정부패의 증거들을 발견했다. 일부 백인 후견인과 관리인은 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후견인 제도를 이용해서 자신이 보호해야 하는 사람들의 돈을 사취하는 백인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오클라호마의 백인들은 인디언을 죽이는 일을 1724년과 마찬가지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2012년 어느 여름날, 나는 기자로 활동하며 살고 있는 뉴욕을 출발해 처음으로 포허스카를 방문했다. 거의 100년 전에 발생한 오세이지 살인사건들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있을까 하는 희망에서였다. 대부분의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학교에 다닐 때는 어느 책에서도 이 사건을 접한 적이 없었다. 마치 이 범죄가 역사에서 삭제된 것 같았다.



역사는 무자비한 판관이다. 우리의 비극적인 실수와 멍청한 부주의를 낱낱이 드러내고, 우리의 가장 내밀한 비밀을 폭로하며, 처음부터 미스터리 소설의 결말을 알고 있는 오만한 탐정처럼 아는 척을 한다.



“1907년부터 1923년까지 16년 동안 오세이지족 605명이 사망했다. 연평균 약 38명이며, 인구 1,000명당 연간 사망률로 계산하면 약 19명이다. 현재의 전국적인 사망률은 1,000명당 약 8.5명이다. 1920년대에는 통계를 내는 방법이 그리 정확하지 않았고 백인과 흑인의 통계가 따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백인의 경우 평균 사망률은 1,000명당 거의 12명이었다. 오세이지족은 생활수준이 높았으므로 미국 백인보다 사망률이 낮았어야 맞다. 그런데 오세이지족의 사망률은 전국 평균보다 1.5배 이상 높았다. 그것도 1907년 이후에 태어나 이 인명부에 이름이 오르지 않은 오세이지족을 제외한 숫자였다.



살인음모에서 의사들은 사망증명서를 위조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장의사들도 재빨리 조용하게 시체를 묻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