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상 조직이 경영을 통해 위기를 극복한 예는 없다. 모든 위기는 리더십을 통해 극복됐다. 그런데도 오늘날 수많은 교육 기관과 훈련 프로그램은 훌륭한 리더 양성이 아니라 효과적인 매니저 교육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수직적 위계서열 속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을 윗선에서 알아주길 바란다. 우리는 인정받고 상을 받기 위해 손을 번쩍 든다. 대부분의 사람이 상사에게 더 많이 인정받을수록 더 많이 성공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를 관리하는 상사가 회사에 계속 남아 있고, 그 상사가 위로부터 지나친 압박을 느끼지 않을 때만 효과를 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사람들의 신뢰를 얻기 위해서는 조직의 리더가 먼저 그들을 사람으로 대접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신뢰를 얻고 싶으면 신뢰를 실천해야 했다.
직원들을 단순히 피고용인으로 대할 것이 아니라 가족과 같이 대해야 한다. 표에 적힌 수치를 지키려고 사람을 희생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지키기 위해 수치를 희생해야 한다.
만약 리더가 우리를 돌보지 않는다면 회사의 직원 혹은 단체의 구성원인 우리가 스스로 용기를 내어 서로를 돌보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 자신이 우리가 바랐던 그 리더가 될 것이다.
사람으로 이루어진 어느 집단이 뛰어난 성과를 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는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이 하나의 팀으로서 얼마나 잘 뭉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사일로(silo, 부서 간에 담을 쌓고 자기 밥그릇만 챙기는 기업문화)
직장에서 겪는 스트레스와 불안은 일의 종류와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부실한 경영과 리더십과 더 큰 관련이 있다. 내 기분에 신경 써주는 사람들이 회사에 있다는 것을 알면 스트레스 수준은 내려간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앞가림만 한다는 기분이 들거나 회사의 리더가 직원보다는 수치에 더 신경을 쓴다고 느껴지면 스트레스와 불안 수준은 올라간다. 애당초 우리가 직장을 바꾸려 하는 이유도 바로 이것이다.
아이들의 행복감은 ‘부모가 직장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느냐’보다는 ‘집에 돌아온 부모의 기분이 어떠한가’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도파민: 발전을 위한 인센티브
찾고 있던 것을 찾아냈거나 해야 할 일을 완수했을 때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도파민 때문이다. 도파민은 우리가 중요한 과제를 끝냈거나 프로젝트를 완료했을 때, 목표에 도달했을 때, 심지어 더 큰 목표를 향한 중간 목표에 도달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을 책임진다. 해야 할 일 목록에서 한 가지를 지울 때 기분이 얼마나 좋은지 다들 알 것이다. 바로 그 발전이나 완수의 느낌은 주로 도파민 덕분이다.
신체는 도파민으로 보상을 주면서 우리가 계속해서 일을 하게 만들고 더욱 열심히 해서 마지막에는 막대한 양의 도파민을 얻을 수 있게 한다. 당연히 목표가 클수록 더 많은 노력이 요구되고 우리가 얻는 도파민의 양도 많아진다. 열심히 일해서 뭔가 어려운 일을 해냈을 때 정말로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반면 쉽고 빠르게 해낸 일은 도파민을 거의 분비하지 않을 수도 있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많은 노력을 투입하면 기분이 좋아진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생물학적 인센티브 역시 없다.
기업이 마음의 눈에 보이는 비전을 세워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니까 ‘비전(‘vision’에는 ‘눈’, ‘시력’이라는 뜻도 있다 — 옮긴이)’이지 않은가. ‘볼 수 있어야’ 하니까 말이다. ‘이 분야 최고의 존경을 받는 회사’라는 비전은 막연한 지시 내용처럼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다. 누구에게 존경을 받는다는 말인가? 고객? 주주? 직원? CEO의 부모님? 비전을 향한 진척 정도를 제대로 측정할 방법이 없는데 제대로 나아가고 있는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비전 선언문에 자주 등장하는 ‘최대’니 ‘최고’니 하는 단어들은 생물학적으로 봤을 때 그 비전을 달성하도록 열심히 일하라고 동기를 부여하기에는 무용지물이다.
현대인들이 쇼핑이나 물건 수집을 좋아하는 것은 도파민 때문이다. 딱히 득이 되는 것도 아닌데 우리가 이런저런 취미를 즐기는 이유는 그것이 선사 시대의 수렵채집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때문이다. 다른 도파민 중독처럼 우리가 이런 취미에 중독되어 멈출 수 없다면 기분은 좋을지 몰라도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필요 이상의 돈과 시간을 소모할 뿐만 아니라 도파민을 한 번 더 얻기 위해 사람들과의 관계를 희생하는 경우도 있다.
시대에 적응하고 역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혁신을 개척하는 조직의 능력을 결정짓는 것은 조직의 크기나 자원이 아니라 문화의 힘이다. 환경이 적합할 때, 튼튼한 안전권이 존재하고 모든 사람이 그것을 느낄 수 있을 때 우리는 맡은 일을 가장 잘 해낼 수 있다. 그때 우리는 타고난 방식대로 행동한다. 협동이라는 방식 말이다.
모든 새로운 관계가 마찬가지다. 새 직장에 출근하면 우리도 흥분되고 그들도 흥분되고 모든 것이 완벽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동료들이 내 뒤를 봐주고 내가 성장하게 도와줄 거라고 믿으려면, 정말로 소속감을 느끼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사생활에서나 직장에서나 관계를 쌓아가는 일에는 똑같은 규칙이 적용된다.
위험이 진짜이든 상상에 불과하든 우리가 느끼는 스트레스만큼은 진짜다.
사무실에서는 사람들이 혼자만 알고 있고, 필요할 때만 참여하며, 자기 일만 하고, 일과가 끝나면 집에 간다. 다른 사람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거나 일부러 나서서 타인을 보호하는 일은 쓸데없는 짓이 된다. 그리고 바로 이 때문에 정리해고의 위협도 없고 직무 스트레스가 낮은데도 불구하고 사무실에는 언제나 희미한 불안이 존재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도움을 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이런 무의식적인 불안, 다른 누구도 우리를 도와주지 않고 스스로를 책임져야 한다는 느낌,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 자기 일에만 관심을 쏟는다는 느낌은 우리의 원시적 뇌가 느끼기에는 상당히 무서운 기분이다.
건강하지 못하고 균형이 깨진 문화에서 일하는 것은 에베레스트 산을 등정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환경에 적응한다. 비록 위험한 환경이지만 등산가는 베이스캠프에서 시간을 보내며 적응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 등산가의 신체는 그가 인내할 수 있을 만큼 환경에 적응할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문화도 마찬가지다. 환경이 폭력적이거나 충격적이면, 이를테면 매일 정리해고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곳에 남는 대신 그냥 떠나버릴 것이다. 하지만 환경이 보다 미묘하다면, 사내 정치나 기회주의, 이따금씩 벌어지는 정리해고, 동료들 사이의 일반적 신뢰 부족 같은 정도라면 우리는 떠나는 대신 거기에 적응해버린다.
우리 자신은 편안하다고 생각할지 몰라도 환경의 영향은 분명 그 대가를 치르게 만든다. 우리가 익숙해졌다고 해서, 그게 평상적인 상태가 되었다고 해서, 수용할 수 있는 일인 것은 아니다. 에베레스트의 경우, 우리가 적응한 후에도 산에 너무 오래 머물면 내장기관이 망가지기 시작한다.
높은 직책이나 연봉을 제안 받더라도 직원들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는 쪽을 선호했다. 직원들은 단순히 부자가 될 수 있는 직장보다는 동료들 사이에서 안심할 수 있고, 성장의 기회가 있으며, 자기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된 느낌을 가질 수 있는 직장에서 일하는 편을 선택했다.
리더는 직원들이 자연히 잘 성장하고 조직의 이익을 증진시키게 되는 문화를 창조할 힘을 가졌다. 일단 기업문화와 가치가 분명하게 정의되고 나면 리더처럼 행동하고 그 가치를 열심히 지키고 안전권을 튼튼하게 유지하는 일은 조직에 속한 모든 사람의 책임이 된다. 공식적인 리더의 자리에 있든 아니든 상관없이 말이다.
리더십이란 공식적인 직책이 있든 없든 타인에게 봉사하겠다는 선택이다. 권한은 있으나 리더가 아닌 사람들도 있고, 조직의 가장 낮은 직책에 있지만 틀림없는 리더인 사람들도 있다. 리더가 자신에게 주어진 많은 특권들을 누리는 것은 좋다. 하지만 중요할 때 그들은 그런 특권을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
리더는 좌우에 있는 사람들을 기꺼이 지켜주는 사람이다. 리더는 우리를 위해 자신의 편의를 기꺼이 희생하는 사람이다. 우리와 생각이 다를 때조차 말이다. 신뢰는 단순히 여러 사람이 갖고 있는 의견이 아니다. 신뢰는 누군가 우리의 안녕을 마음에 새기고 있다고 믿을 때 나타나는 생물학적 반응이다. 리더는 우리를 위해 기꺼이 자기 것을 포기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시간, 노력, 돈, 심지어 자신의 접시에 있는 음식까지 말이다. 중요한 순간에 리더는 마지막에 먹는다.
약한 리더는 자신이 보살펴야 할 사람들을 보호하겠다는 책임을 받아들일 때만, 오직 그때만 리더가 될 수 있다.
훌륭한 리더는 스포트라이트를 마다하고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자신의 사람들을 지원하고 보호한다. 그렇게 해서 안전권이 형성되었다고 느끼면 우리는 피와 땀과 눈물을 바쳐 할 수 있는 수단을 동원해 리더의 비전을 실현시킨다. 리더가 해야 할 유일한 일은 자신이 누구에게 봉사하는지를 잊지 않는 일이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반대로 우리가 그에게 봉사하는 것을 기쁘고 영광스럽게 여길 것이다.
“지위에 따라 받게 되는 그 모든 특전들, 혜택들, 우선권들은 여러분에게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여러분이 수행할 역할에 주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역할을 떠나게 되면, 결국은 떠날 텐데, 그들은 당신을 대체하는 사람에게 사기 찻잔을 내밀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원래가 스티로폼 컵이 마땅한 사람이니까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동기를 줄 수는 없다. 동기는 각자의 내부에 있는 화학적 인센티브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가 가지는 모든 동기는 나를 기분 좋게 해주고 스트레스나 고통을 피하게 해주는 행동을 반복하려는 열망이 작용한 것이다.
규칙이란 정상 상황을 위해 존재한다. 규칙은 정상 상황에서 위험을 피하고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게 만들어진다.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가이드라인이 있기는 하지만 결국에는 우리는 전문지식을 가진 소수의 특별한 사람들이 언제 규칙을 깨야 할지 알고 있다고 신뢰한다.
구성원에게 규칙을 가르치고 능력을 키우고 자신감을 쌓도록 훈련시키는 일은 리더의 책임이다. 그럴 때 리더는 한 발 뒤로 물러서서 구성원들이 자기 일을 인지하고 해야 할 일을 하리라고 신뢰해야만 한다.
리더의 책임은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위에서 보호막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자신에게 옳은 일을 해도 되는 권한이 있다고 느끼는 사람은, 때로 규칙을 깨는 한이 있더라도 그 상황에서 옳은 일을 할 가능성이 크다. 용기란 위에서부터 주어지는 것이다. 옳은 일을 할 수 있는 자신감은 리더가 자신을 얼마나 신뢰한다고 느끼는지에 따라 정해진다.
사람보다 수치나 자원을 우선시하는 사고는 인류학적으로 리더들이 제공하기로 되어 있는 ‘보호’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이것은 마치 부모가 아이보다 자동차를 먼저 생각하는 격이다. 그랬다가는 가족이라는 조직이 산산조각 날 것이다. 가족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현대 리더들이 우선순위를 그런 식으로 바꿔버리면 회사 내의 인간관계(심지어 우리 사회의 관계)는 완전히 망가진다.
예일 대학교의 심리학자 스탠리 밀그램은 이 문제를 더 깊이 이해하고 싶었다. 우리 인간은 정말로 누군가 우리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 권위 있는 사람이 명령을 내리면 그것이 우리의 도덕 규칙이나 옳고 그름의 개념에 정면으로 위배되더라도 그냥 그대로 복종하는, 우르르 몰려다니는 들쥐 같은 존재일까?
부실한 문화를 주도하는 리더는 옳은 일을 할 수 있게 직원들의 자신감을 키워주는 프로그램에 투자하지 않는다. 오히려 명령 및 통제를 통해 직원들이 자기에게 피해가 오지 않게 일하는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우리 중 65퍼센트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 우리가 해치고 있는 사람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게 되면 의사결정의 주요 동기는 ‘내가 곤란해지지 않을까’, ‘일자리를 잃는 것은 아닐까’, ‘목표치를 달성 못하는 것 아닐까’, ‘서열에서 밀려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된다.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던 독일 병사들이나 ‘실험을 계속해야 돼’라고 중얼거리던 밀그램의 지원자들처럼, 우리 역시 타인을 해치는 결정을 내렸을 때 스스로를 변호하거나 책임을 떠넘기기 위한 우리만의 현대판 주문을 갖고 있다.
사람 대신 수치를 사용할 때 생기는 단점이 바로 이런 것이다. 어느 지점에 가면 수치는 사람과의 연관성을 잃어버리고 그저 의미 없는 숫자가 된다. 우리는 시각적인 동물이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쫓는다. 곤궁에 처한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달려가 돕는다. 지금 세상보다 더 밝은 미래의 분명한 비전이 있다면 우리는 그 미래를 위해 일할 수 있다. 한 가지 수치에서 다른 수치로 지표를 개선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일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오직 수치뿐이라면, 우리는 자신이 내린 결정이 저 멀리서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는 목표를 달성했을 때 보너스를 주는 상사보다는, 영업시간이 끝난 후에도 시간을 내서 나를 도와주는 상사를 더 소중하게 생각한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조급한 세상이다.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세상, 도파민이 지배하는 세상이다. 구글은 원하는 답을 지금 당장 찾아준다. 원하는 물건이 있으면 지금 당장 온라인으로 사서 받을 수 있다.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보고 싶은 프로그램을 보려고 일주일을 기다릴 필요 없이, 지금 당장 볼 수도 있다. 우리는 원하는 것을 원하는 때에 얻는 데 익숙해졌다. 영화나 온라인 쇼핑의 경우라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폭풍우도 이겨낼 수 있는 튼튼한 신뢰를 형성하고 싶다면 이런 것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신뢰를 쌓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그 시간을 단축해줄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 따위는 없다.
19세기의 위대한 사상가 괴테는 대략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이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면, 그 사람을 쉽게 판단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일을 묘사할 때 어떤 단어를 선택하는지 살펴보면 흥미롭다. ‘좋아한다.’, ‘자부심’ 같은 단어는 각각 옥시토신 및 세로토닌과 연관된 감정들이다.
리더의 역할은 고래고래 명령을 내지르거나 미션의 성공과 실패에 대해 전적인 책임을 지는 일이 아니었다. 리더가 해야 할 일은 책임지고 부하들 한 명 한 명이 성공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 부하들을 잘 훈련시켜서, 자기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만드는 것이 리더가 할 일이었다. 부하들에게 책임을 맡기고, 알아서 미션을 진행하도록 만드는 일 말이다.
리더가 언제나 옳아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리더십이란 옷깃에 표시된 계급이 아니다. 그것은 품성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책임감이다. 리더십은 정직하고 솔직하게 책임지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이 신뢰를 낳는다. 리더십은 우리가 듣고 싶은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들어야 하는 말을 하는 것이다. 진짜 리더가 되고 싶다면, 깊은 신뢰와 충성심을 얻고 싶다면, 우선 진실을 말하라.
누구나 자신이 일하는 회사의 매니저나 리더를 살펴본 후 다음과 같이 자문해봐야 한다. ‘나는 저 사람과 함께 참호에 들어가고 싶은가?’ 그리고 직원들의 노력에 의존하는 회사 리더나 매니저들 역시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한다. ‘직원들이 아니라고 답한다면 우리 회사는 과연 얼마나 튼튼한가?’
대형 기업의 리더들은 자신들이 내린 결정을 빈번하게 뒤집는다. 우리는 사람이든 기업이든 실수를 할 수도 있고 멍청한 선택을 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 점에 대해 우리는 아무런 불만도 없다. 언제나 옳은 결정을 내리기 때문에 사람들 사이 혹은 사람과 조직 사이의 신뢰가 생기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신뢰를 만드는 것은 정직한 태도다.
우리가 지닌 21세기식 자본주의는 능력주의 문화에서 일한다는 기대를 거짓으로 만드는 것 같다. 많은 경우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회사의 실적이 조금이라도 미달되면 직원들은 해고를 당할 것이다. 그러고도 비즈니스일 뿐이니 유감은 갖지 말라고 한다. 작년에 기대만큼 돈을 못 벌었다고 해서 자녀 중 한 명을 내보낸다는 것을 상상이나 할 수 있는가? 처음부터 그런 계획을 세우고 있다면 자녀들이 어떤 기분일지 한 번 상상해보라. 이게 바로 요즘 수많은 회사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리더십은 사람을 책임지는 것이지 수치를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관리자는 우리가 만든 수치와 결과를 챙기지만, 리더는 우리를 챙긴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제공하는 인센티브 구조는 직원들의 협력이나 정보 공유, 부서 간 지원 요청이나 지원 제공 등에 대해서는 보상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회사는 안전권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행동이나 활동을 강화하지 않는다.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회사들의 인센티브 구조는 도파민 중독을 가능하게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키우고 부추기도록 설계되어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감사하게 여기는 것은 그것을 쉽게 얻을 수 있을 때가 아니라 힘들게 노력해야 하거나 얻기가 어려워서 큰 가치를 가질 때이다. 땅속 깊은 곳의 다이아몬드이든, 커리어의 성공이든 인간관계든, 모든 것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그것을 얻기까지 필요한 고난이다.
우리가 애정을 갖고 기억하는 것은 업무가 아니라 동지애이며, 그 일을 완수하기 위해 우리 팀이 어떻게 힘을 합쳤던가 하는 점이다. 그 이유는, 다시 말하지만, 자연스런 것이다. 힘든 시기에 서로를 도와주려고 노력하면 우리 신체는 옥시토신을 분비한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려움을 나눌 때 생물학적으로 더 가까워진다.
인간의 영혼에 불이 붙는 것은 회사의 리더가 성장해야 할 이유를 제시했을 때이다. 분기 목표나 연간 목표를 제시하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충분한 고난이 제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런 목표가 쉽다는 얘기는 아니다. 쉬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회사는 이미 그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이용할 수 있는 자원이 있다.
정말로 동기를 불어넣고 싶다면, 이용가능한 자원의 크기를 넘어서는 도전이 필요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비전이 필요하다. 일하러 와야 할 이유 말이다. 단순히 큰 목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위대한 조직의 리더들은 이 일을 해낸다. 그들은 말 그대로 아직 아무도 무엇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모를 만큼 버거운 도전 과제를 제시한다.
리더란 남보다 더 적게 해도 되는 면허가 아니라, 남보다 더 많이 해야 할 책임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어려운 부분이다. 리더십에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간과 에너지가 든다. 그 효과가 항상 쉽게 측정되거나 즉시 나타나는 것도 아니다. 리더십은 언제나 인간에 대한 헌신이다.
리더십, 진정한 리더십은 꼭대기에 앉아 있는 사람의 요새가 아니다. 그것은 집단에 속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가져야 할 책임감이다. 공식적 직위를 가진 사람은 더 큰 규모로 리더십을 발휘할 권한이 있을 수도 있지만, 우리 각자에게도 안전권을 튼튼하게 유지할 책임이 있다. 우리 모두가 오늘부터 다른 사람을 위해 작은 일들을 시작해야 한다. 하루 하나씩이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