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살고 있는 곳은 이토록 천박한 도시다. 살인, 강도, 납치, 강간, 뭐든지 나와 상관없으면 시민들은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건을 감상한다. 프롤레타리아 대중이 모두 냉혈동물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현대사회의 인간은 공감능력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좋게 말하면 이성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냉혹하다. 과학기술이 발전할수록 정보는 더 쉽게 유통되고, 우리는 세상일에 점점 더 마비된다. 어쩌면 세상에 나쁜 일이 너무 많아서 냉혹해져야 했는지도 모른다. 합 겹 또 한 겹의 갑옷으로 자신을 감싸고서 이 ‘번화한 사회’에 적응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방관자적 입장에서 사물을 보아야 마음의 상처를 입지 않는다.
인간의 마음은 몹시 연약하다.
지금 이런 감각을 ‘미시감’이라고 하는 거겠지? 낯선 사물을 익숙하게 느끼는 ‘기시감’과 반대로 미시감은 익숙한 사물에 대해 낯선 감각을 느낀다. 이상한 것은, 낯설긴 한데 또 한편 완전히 낯선 느낌은 아니라는 점이다. 마치 기시감과 미시감을 동시에 느끼는 것 같다.
언론 보도란 아무리 객관적이어도 역시 사람이 쓰는 것이다, 사람이 처리하는 정보에는 편차가 있기 마련이다, 좋은 기자는 언제 어디서든 진실을 찾아내 사실대로 기사를 써야 한다!
홍콩에서는 땅이든 건물이든 정책이든 혹은 주민들이든 모두 다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다. 땅이 부족하면 바다를 메워서 만들어내고, 나무를 벤 자리에 40층짜리 높은 빌딩을 짓는다. 빌딩에는 쇼핑몰이 꼭 들어가 있고, 쇼핑몰에는 푸드코트와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이 입점한다. 주민들은 블록 쌓기 놀이를 하듯 수많은 상자로 이루어진 40층 건물 속에 들어가 있다. 그들은 매일 철도를 따라 도시 중심가의 상업지구를 오가며 노동력과 지혜를 판다. 퇴근해서 집으로 돌아갈 때는 주상복합 빌딩 아래 대형 마트에 가서 일상용품을 구입한다. 휴일이 되면 쇼핑몰의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거나 영화관 옆 가라오케에서 세 시간 정도 유행가요를 부른다. 어린아이들은 학교에서 똑같은 지식을 배우고, 목표는 그저 대학에 들어가는 것뿐이다. 대학에 가서도 전공과목이 무엇이든 목표는 그저 40층 상자 속의 블록 하나가 되는 것이다.
절대 바뀌지 않는다.
바이 의사는 속으로 생각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심리치료를받는다고 하면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많다. 게다가 1년씩이나 계속한다고 하면 더 그렇다. 하지만 다른 각도로 생각해보면 일주일에 50분에서 한 시간 정도 의사와 상담을 할 경우, 1년을 다 합쳐도 겨우 50시간이다.
과거 어느 땐가 이 세계에는 정의가 있고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은 위대하며 죄악을 없애고 착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이런 모든 이유들이 사라져 버렸다. 남은 것은 새하얀 세계.
한 점 부끄러움 없이 강직하고 올바른 사람조차도 비명횡사할 수 있다. 불행이 닥쳐올 때는 아무도 막을 수 없다. 세계는 잔혹하다.
미국 심리학자가 이런 말을 했어요. 가장 심각한 감정적 손상은 한 번도 논의되지 않은 상처다. 오직 입 밖에 내어 말을 해야만 치료의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