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줄리언 웰즈의 죄

uragawa 2014. 9. 4. 23:00

“어디서 들은 말인데,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는 건 처음 채찍을 휘두르기 전이 아니라 휘두르고 나서래.” 마을 외각으로 빠지는 도로를 향해 걸어가면서 줄리언이 말했다. 그러고는 걸음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근데 정작 중요한 건 채찍질을 당하는 사람이 느끼는 감정 아니겠어? 죄책감은 사치야, 필립.”



“들으면 놀랄지도 모르겠는데.” 줄리언이 부드럽게 말했다. “인생은 그림자 게임이라고, 친구.”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줄리언에게로 내려갔어야 했다. 인생에 해피엔딩만 있다면, 친구라면 마땅히 그렇게 했을 것이다. 창문에서 내려다보다가 어스름한 불빛 속에 앉아있는 자신의 친구를 발견했다면, 그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만은 알아차렸을 것이다. 친구는 자신의 침대를 바라보며 당장 그 안으로 들어가 눞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부드러운 베개와 시트를 그리워했을 것이다. 뼛속까지 파고드는 피로감에 단잠과 꿈을 갈망했을 것이다. 그러나 결국에는 옷을 갈아입고 아래층으로 다시 내려가 괴로워하는 친구를 마주보고 앉아 “얘기 좀 해봐.”라고 말했을 것이다. 젊고 경험도 별로 없지만 때로는 그런 몸짓만으로도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걸 알았을 것이다.

삶이란게 인간에게 우호적인 얼굴을 보여주도록 설계된 거라면, 이 친구는 이런 것들을 알고 행동으로 옮겼을 것이다.

 

 

 

르네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줄리언은 맑은 눈을 갖고 있었네. 언젠가 그러더군. ‘사랑이 뭔지 알아요, 르네? 시야가 흐려지는 거예요.’”

그가 살짝 몸을 들썩였다. “낭만주의자는 그런 말을 하지 않지.”

나는 줄리언의 말이 참으로 씁쓸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 어떤 사랑도 냉철한 마음의 취조를 견뎌내지 못한다는 생각과 사랑이야말로 영리한 사기꾼이라는 생각을 담고 있는 말이었다.

 

 

 

“난 그런 생각을 종종해. 인생이란게 정말로 공평하다면, 우리가 가는 길을 계속 걸어가면 종국에는 어디에서 끝이 날지를 보여주는 사진을 얻게 될 거라는 생각.” 그녀는 고개를 돌려 미소 띤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지만, 그 미소는 곧 사라졌다. “그 사진 한 장만으로도 우리 목숨을 충분히 구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언젠가 줄리언은 죄책감이 실질적인 피해를 입지 않은 사람들의 가식적인 위안이라고 하더군.”

 

 

 

“이 여행도 끝이 보이는 것 같으니까 미리 말해두는데, 오빠랑 함께 해서 즐거웠어. 오빠랑 함께 여행하고 이야기를 하고 오빠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즐거웠어.”

“나도 그래, 로레타.”

그녀가 소리내어 웃었다. “지금 우리가 하는 대화를 책에서 읽는다면 진짜 손발이 오글거리는 장면이겠다. 그렇지?”

“그래, 그럴 것 같네.” 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하지만 이렇게 감상에 젖는 순간이 인생에서 최고의 순간일 때가 많아.”

 

 

 

“기자세요?” 레온이 내게 물었다.

“아뇨.” 내가 대답했다. 그러고는 문학 비평가라고 말하려는데 이젠 더 이상 내 자신을 그렇게 소개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는 누구인가? 살면서 처음으로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이런 예상치 못했던 일에도 웬일인지 유쾌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