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uragawa 2013. 1. 30. 09:00

우리 셋은 서로의 결속을 다지는 상징으로 손목시계의 앞면을 손목 안쪽으로 돌려서 차고 다녔다. 당연히 허세였지만, 그 이상의 뭔가가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있으면 시간이 사적인 것으로, 심지어는 내밀한 것으로 느껴졌다. 우리는 에이드리언이 그 제스처를 눈여겨 보고 그대로 따를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지 않았다.



그렇다. 당연히 우리는 허세덩어리였다. 달리 청춘이겠는가.

우리는 ‘벨탄샤웅’이니 ‘슈투름 운트 드랑’이니 하는 용어를 즐겨 썼고, ‘그건 철학적으로 자명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했고, 상상력의 첫 번째 의무는 위반하는 것이라고 서로에게 다짐하듯 확언했다. 우리의 부모들은 상황을 다른 시각으로 보았는데, 자식들이 갑자기 유해한 세력에 노출돼버린 순진무구한 존재라고 상상했다. 그래서 콜린의 어머니는 내가 당신 아들의 ‘어둠의 천사’라고 여겼고, 우리 아버지는 내가 『공산당 선언』을 읽는 게 앨릭스 탓이라고 했고, 앨릭스의 부모는 콜린이 미국 하드보일드 범죄소설을 읽는다고 콜린의 부모에게 일러 바쳤다. 대강 그런 식이었다.



선생들이나 부모들은 자기들에게도 어린 시절이란게 존재했음을 짜증이 날 정도로 들먹이면서, 그러니까 내 말을 들으란 식이었다. 그것도 다 한때야,라고 그들은 우기곤 했다. 언젠가는 그런 데서 벗어나게 될 거야. 현실이 뭔지, 현실성이 뭔지, 인생으로부터 깨우치게 될 테니까. 그러나 그때 우리는 소싯적의 한 순간이라도 그들에게 우리 같은 때가 있었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고, 투항해버린 연장자들보다는 우리가 삶-그리고 진실과 도덕과 예술-을 더 확실하게 포착했다고 믿었다.



나는 살짝 겁이 났다. 그날 하루가 흐트러지는 게 싫었다. 그러나 지금 돌이켜보면, 흐트러지기 시작한 건 그날 하루가 아니라 우리 넷이었다.



나는 우리 모두가 이러저러하게 상처받게 마련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완전무결한 부모와 오누이와 이웃과 동료로 이루어진 세상을 사는 것도 아닌데, 상처를 피할 도리가 있을까.



마지막으로 남긴 편지에서 그 검시관에게 자신의 자살 이유를 설명해 놓았다. 그는 삶이 바란 적이 없음에도 받게 된 선물이며, 사유하는 자는 삶의 본질과 그 삶의 딸린 조건 모두를 시험할 철학적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가 만약 바란 적이 없는 그 선물을 포기하겠다고 결정했다면, 결정대로 행동을 취할 윤리적, 인간적 의무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론 부분은 실질적으로 자신의 논지가 타당함을 알리고자 하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충동적으로 결정한 다음, 그 결정을 정당화할 논거의 하부구조를 새운다. 그런 후, 그렇게 만들어진 결과를 상식이라고 말한다.




또, 젊었을 때는 노년에 겪을지 모를 고통과 황폐를 미리 예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홀로인, 이혼을 한, 상처한 자신을 상상해본다. 자식들도 커서 품을 떠나고, 친구들도 하나둘씩 세상을 떠난다. 입지가 사라지고 욕망이, 이성을 끄는 매력이 사라지는 것을 상상해본다. 더 나아가 다가올 자신의 죽음, 세상 어떤 동반자를 구한다 해도 홀로 맞설 수밖에 없는 죽음까지도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결국 앞을 내다보는 행위일 뿐이다. 앞을 내다보고, 그러고 나서 그 미래로부터 과거를 돌아보는 자신을 상상한다는건 불가능하다.




사춘기가 끝나갈 무렵, 모험이라는 것에 대책없이 취했던 게 기억난다. 성인이 된 나 자신에 대해 이런저런 걸 상상했다.
어디를 갈 것이고, 이런 걸 하고, 저런 걸 발견하고, 그녀를 사랑하고, 또 다른 그녀, 또 다른 그녀, 또 다른 그녀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소설 속 인물들처럼 살 것이라고, 또 그렇게 살아왔다고. 어떤 소설처럼 살았는지는 꼬집어 말할 수 없지만, 오직 열정과 위험, 황홀경과 절망(이 있으나 그후에 더 크게 찾아오는 황홀경)뿐일 거라고.



지금에 나로선 너에게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지만, 시간은 그럴 수 있지, 시간이 말해줄 거야.
시간은 늘 그렇거든.



내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의 현실에 안주했고, 삶의 불가항력에 복속했다. 만약 이렇다면 이렇게, 그렇다면 저렇게하는 식으로 세월을 보냈다. 에이드리언 식으로 말하면 나는 삶을 포기했고, 삶은 시험해보는 것도 포기했고, 삶이 닥쳐오는 대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난생처음, 나는 내 온 인생에 대해 한결 총체적인-자기연민과 자기혐오 사이의 어딘가에 위치한-후회의 감정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살아온 어느 하루도 후회되지 않는 날이 없었다.



살아남은 우리의 대부분은 늙는 데 연연한 적이 없다. 내 판단이지만, 요절하는 것보다는 늙는 것이 언제나 나은 법이다. 아니, 내 말뜻은 이렇다. 이십대에느 자신의 목표와 목적이 혼란스럽고 확신이 서지 않는다 해도, 인생 자체와, 또 인생에서의 자신의 실존과 장차 가능한 바를 강하게 의식한다. 그후로...... 그후로 기억은 더 불확실해지고, 더 중복되고, 더 되감기하게 되고, 왜곡이 더 심해진다. 젊을 때느 산 날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온전한 형태로 기억하는 게 가능하다.
노년에 이르면, 기억은 이리저리 찢기고 누덕누덕 기운 것 처럼 돼버린다.



인생에 대해 내가 알았던 것은 무엇인가, 신중하기 그지 없는 삶을 살았던 내가. 이긴 적도, 패배한 적도 없이, 다만 인생이 흘러가는 대로 살지 않았던가. 흔한 야심을 품었지만, 야심의 실체를 깨닫지도 못한 채 그것을 위해 섣불리 정착해버리지 않았던가. 상처받는 게 두려웠으면서도 생존력이라는 말로 둘러대지 않았던가. 고지서 납부를 하고, 가능한 한 모든 사람들과 무난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살았을 뿐, 환희와 절망이라는 말은 얼마 지나지 않아 소설에서나 구경한게 전부인 인간으로 살아오지 않았던가. 자책을 해도 마음속 깊이 아파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았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