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그래스호퍼

uragawa 2011. 3. 29. 14:35

“정치가의 비서가 자살을 한다고, 뭐가 어떻게 된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누군가 자살을 하면 관심이 분산되니 효과가 있다는 말이다.”
비서가 ‘모두 제 책임입니다’라는 어린애도 하지 않을 거짓말을 남기고 목을 매면, 일단 그것만으로도 정치가에게 쏟아지던 비난 수위가 낮아진다.




어리석고 추하고 성가시다. 어리석고 추한 것은 참을 만해도 성가신 것은 거슬린다.




‘당황 할 것 없어, 잠깐 육체가 조화를 잃었을 뿐.’




바지락을 해감시키는 시간. 그것을 바라보는 시간이 세미에게는 가장 행복한 시간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몰라도 바지락의 호흡을 바라볼 때 만큼 마음이 평온해지는 순간도 없다.
세미는 이따금씩 생각한다. 인간도 이런 식으로 숨을 쉬는지, 안 쉬는지 기포나 연기로 알아볼 수 있으면 좀 더 살아 있다는 게 실감나지 않을까? 지나가는 사람들이 입 밖으로 부글부글 기포를 내뿜으면, 무턱대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힘들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바지락이야 곧 배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불안해하거나 화를 내는 것은 동물적이지만,”
죽은 아내가 한 말이 떠오른다.
“문제의 원인을 알아내고,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하는 건 오로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인 것 같아.”




“자기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거지.”
히요코가 웃는다.
“아무리 위험한 상황에 처해도 난 괜찮겠지, 그런 생각을 한다고. ‘위험’이라고 쓰인 상자를 보고도 실제로 열어보기 전엔 뭐가 그리 위험할까, 하면서 우습게보지. 지명수배자가 파친코에 들어가는 것과 같은 심리야. 설마 뭔 일이야 있겠어? 그러는 거지, 위험은 하나하나 단계를 밟아 찾아온다고 믿는거야. 폐암에 걸린다는 말을 골백번 들어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거나 매한가지지.”




“그래, 바지락. 인간하고 바지락 중 어느 쪽이 위대한지 알아?”
세미가 물었다.
“당연히 인간이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
“어이, 그거 아나 몰라. 인간의 지혜나 과학은 인간한테만 도움이 된다는거. 다른 어떤 개체도 세상에 인간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그런 생각은 안한다, 그거야.”




그 날 오후 신칸센을 타고 도쿄 역으로 돌아온 스즈키는 쾌속열차를 타기 위해 플랫폼에 서 있었다. 저녁 시간이라 승객이 꽤있다. 허리가 굽은 노인도 있고, 머리를 염색한 남녀도 있다. 다들 따분한 표정으로 가방을 들고 있다. 바닥에 눌어 붙은 비둘기 똥이 흰 도료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