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서점 일기

uragawa 2021. 3. 15. 22:30

멋모르는 사람들에게 ‘종고 서점 운영’은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는 난로 옆에서 안락의자에 슬리퍼 신은 발을 올리고 앉아 입에 파이프를 물고 기번이 쓴 『로마제국 쇠망사』를 읽고 있노라면, 지적인 손님들이 줄줄이 들어와 흥미로운 대화를 청하고 책값으로 두둑한 현금을 놓고 나가는 그런 목가적인 일이 결코 아니라는 효과적인 경종을 울려준다.



대부분의 책 거래는 생판 모르는 사람이 전화를 해서 최근에 가까운 사람이 세상을 떠나 고인의 책을 처리하는 일을 맡게 됐다는 얘기를 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당연히 그 사람들은 아직 고인을 애도 중인 경우가 많아서 얘기를 듣다 보면 아주 약간이라도 그 슬픈 감정에 동요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고인이 남긴 책들을 훑어보다 보면 그 사람이 누구였는지, 관심거리는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성격까지도 어느 정도는 엿볼 수 있게 된다. 그런 일에 익숙해지다 보니 이제는 친구네 집에 가서도 책장부터 관심이 가고, 특히 친구에 대해 내가 전혀 몰랐던 점을 드러내거나 뭔가 친구와 어울리지 않는 책에 시선이 간다.



찾는 책이 없다는 말을 들은 다음에도 왜 특별히 그 책을 찾아야 하는지 이유를 아주 길고 따분하게 설명하는 손님들이 종종 있다. 이런 행동은 여러 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그중 가장 설득력 있는 것은 바로 지적 자위행위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본인이 습득한 정보가 있으면, 그게 뭐든지 일단 거들먹거리며 과시하기로 작정한 이상 내용이 틀리든 맞든 지겹게 웅얼거린다. 그것도 궁지에 몰린 책방 주인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다 들릴 만한 소리로 말이다.



어떤 사람이 전화해서 “책 낭독 행사는 잘되어 가나요?”라고 물었다. 좀 더 얘기를 들어보니 그 사람이 쓰는 작품의 장르는 판타지인데 가장 최근에 쓴 인어에 관한 책을 낭독하고 싶다며 이렇게 말했다. “소설의 배경이 바다예요.” 대체 인어에 대한 책이 바다가 아니면 어디가 배경이어야 하는 건지 당최 모르겠다.



어떤 손님이 계산대로 책 세 권을 가져와서 그중 두 권을 가리키더니 “이거 두 권만 살 거예요. 나머지 하나는 다시 책장에 꽂아 두세요”라고 했다. 그러고는 이어서 테스코 포인트카드로 결제할 수 없냐고 물었다.



어떤 손님이, 나이 들고 기력 없어 보이는 남편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소리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방금 뒤쪽 정원을 구경하다 왔어. 나가는 문에 ‘관계자 외 출입금지’란 안내판이 붙어 있었는데 그냥 무시하고 열어 봤지. 진짜 예쁘더라고.”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를 오늘 저녁에 다 읽었다. 내가 오후에 이 책을 읽고 있는 것을 본 어떤 손님이, 이 책이 재미있었으면 닉 케이브의 『그리고 바보는 천사를 보았다』도 좋아할 거라고 추천해 주었다. 페이퍼백 코너에 한 권이 있길래 읽기 시작했다.



점심시간 직전에 한 손님이 들어와 엄연히 80파운드라고 적혀 있는 책을 10파운드에 사겠다고 우겼다. 그래서 정중히 부탁한다면 10파운드 정도는 깎아 줄 수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책을 계산대에 쾅 하고 내려놓고는 혐오스럽다는 듯이 나가 버렸다. 이 순간 오늘은 손님들로부터 도피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새로 읽을 책을 찾아서 사무실로 숨어 버렸다. 그 책은 『유괴』였다. 그 마지막 손님에게 이런 운명이 닥쳤다면 아주 고소했을 텐데.



대체로 중고 책방 주인은 사서를 싫어한다. 중고 책 한 권이 좋은 가격을 받으려면 책 상태가 아주 좋아야 한다. 하지만 사서들은 좋은 상태의 책을 받아서 일반인의 손으로부터 책을 보호하기 위해, 앞뒤 생각 않고 책 표지를 비닐로 싸기 전에 온갖 종류의 도장과 스티커로 책을 도배한다. 책을 보호한다는 명목 아래 공공 도서관에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취급을 받은 책들이 겪는 최종적인 불명예는, 일반 독자가 그 책들을 싼 가격에 구입할 수 있게 되기 전에 맨 앞장의 빈 면지를 찢어버리고 제목이 적힌 페이지에 ‘폐기 처분’이라는 낙인을 찍어버리는 일이다. 이렇게 도서관의 시스템을 거친 책들은 그렇지 않은 책에 비해 그 가치가 대략 4분의 1 이하로 추락한다.



전화벨이 계속 울려서 아침 8시 55분쯤에 전화를 받으러 급히 달려 내려갔다. 그러다가 바짓가랑이 부분에 차를 왕창 쏟고 말았다. 가까스로 전화를 받자 들려오는 목소리, “뉴턴 스튜어트에서 위그타운으로 가는 다음 버스가 몇 시에 있는지 아세요?”



아주 작은 한 5살 정도 돼 보이는 남자아이가 들어와 엄마 생일 선물을 사고 싶은데 도와달라고 했다. 가진 돈은 4파운드였다. 호기심이 생겨서 이것저것 물어보다가, 아이 엄마가 정원 가꾸기를 좋아하는 걸 알아내고 6파운드짜리 ‘컨테이너 원예’에 관한 책을 찾아 주었다. 책값은 니키가 4파운드에 해 주었다.



오늘 아침 한 손님이 우리가 지난주에 발송한 책을 다음과 같은 메시지와 함께 반품했다. “책이 중고 같으니 환불해 주세요. 새 책이 아니네요.” 해당 책은 존 맥코믹의 『바람 속의 깃발』이었는데 표지를 일부러 낡고 오래된 느낌으로 디자인한 책이다. 그러니까 보낸 책은 완전히 새 책이었다.



오후에 한 손님이 서점 안을 한 시간 동안 돌아다녔다. 그러다 마침내 계산대로 와서 한다는 말이 이랬다. “난 중고 책은 절대 안 사요. 어떤 사람이 만졌을지, 또 어디 있었을지도 모르잖아요?” 중고 서점 주인한테 하기엔 참 예의 없는 말인 건 그렇다 치고, 그렇게 따지면 서점 안에 있는 책들 역시 어떤 사람이 만졌는지 어떻게 알겠는가? 당연히 장관에서부터 살인자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사람들 손이 닿았을 것이다. 책이 갖고 있는 이런 숨겨진 역사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상력을 자극하는 흥미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얼마 전 친구와 얘기하다가 책의 여백에 적힌 글귀나 주석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은 적이 있다. 이 문제 역시 논쟁의 소지가 있다.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메모라든지 누군가 휘갈겨 쓴 글씨 때문에 아마존을 통해 주문받고 배송한 책이 다시 반품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하지만 나는 이런 흔적을 훼손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매력적인 요소로 받아들인다. 나와 같은 책을 읽었던 다른 사람의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니까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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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IARY OF A BOOKSELLER(2018)


부제목 겁나 그지같이 지었네
라고 생각한 사람 저요. ㅋㅋㅋ

아 근데 이거 진짜 제목 그대로였구나
거의 1년 치 일기야......

어처구니없는 손님 사례만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정말 줄줄줄줄 일기여서... 생각한 책이 아니었다.


그리고 보통 이런 책은 킬링 타임용인데,
책 사이즈 너무 크고 두꺼워서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하기 어려운 크기와 무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