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

uragawa 2017. 9. 7. 16:48

선생님, 저도 남들처럼 살고 싶습니다.
우리는 이 질병을 권태, 삶이 무의미 하다는 느낌.
풍요롭지만 아무 기쁨도 없는 삶이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다는 느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는 느낌이라 부른다.



모두가 자신의 자유의지로 행동한다는 착각 속에서 산다. 하지만 실제로 현대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착각한다.

-인간은 타인과 같아지고 싶어 한다 中



그중에서 가장 자유를 잘 표현한 것이 플라톤의 동굴 비유가 아닌가 한다. 자기 발의 족쇄를 끊고 아무리 힘들어도 참으며 동굴의 가파른 벽을 기어올라 마침내 정의의 태양을 보겠다는 노력이 없다면 자유가 존재할까? 태양을 본 철학자가 동굴로 돌아가 사람들에게 그들이 본 것은 환영이라고, 진정한 자유는 진리의 인식에서 나온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자유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피곤한 사람, 절망에 빠진 사람, 염세주의자는 자유에 도달할 수 없다. 피곤할수록, 절망에 젖어 있을수록, 염세적일수록 얻을 수 있는 자유는 줄어든다. ‘열정적인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심리학적으로, 퇴보에 빠지지 않고 전진하고 진보하려 노력하는 사람만이 자유로울 수 있다.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혹은 “복지와 평화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사람들이 말하면 나는 그에 대해 어떤 의견도 피력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한다’는 표현을 이용해 우리는 그 누구도 어떤 것을 실제로 책임지지 않는 무의미한 수다의 세계로 들어선다.

- 자유는 진짜 인격의 실현이다 中



활동은 ‘어떤 것을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활동이란 감정의 영역을 물론이고, 지적, 감각적, 의지의 영역에서도 이루어지는 인간의 창의적활동을 말한다. 자발성의 전제 조건은 인격을 전체로 받아들이고 ‘이성’과 ‘본성’으로 나누지 않는 것이다. 인간이 자아의 본질적 부분들을 억압하지 않을 때, 자기 자신에게 명료해질 때, 삶의 다양한 영역을 근본적으로 통합시켰을 때에만 자발적 활동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자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진정한 느낌과 생각을 표현하지 못하는 무능력, 그로 인해 타인과 자신에게 가짜 자아를 내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 열등감과 무력감의 뿔이다. 의식하건 안 하건 자기 자신이 아닌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은 없으며, 진짜 자기 것을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는 것보다 더 큰 자부심과 행복을 주는 것도 없다.



교육은 아주 일찍부터 아이들에게 결코 ‘자기의 것’이 아닌 감정을 느끼도록 가르친다. 특히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무비판적으로 친절하며 소를 지우라고 가르친다. 그래도 미처 교육이 다 하지 못한 것이 있으면 나중에 사회적 압력이 해결해 준다. 웃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 눈에 ‘상냥한 사람’이 아니다. 웨이트리스, 세일즈맨, 의사가 되어 서비스를 팔려면 상냥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육체노동 말고는 팔 것이 없는 사회 피라미드의 맨 밑바닥 사람들과 제일 꼭대기 사람들 만이 특별히 ‘상냥할’ 필요가 없다. 친절과 명랑, 그밖에 미소가 표현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전기 스위치처럼 켜고 끄는 자동 반응이 된다.



개인과 사회의 기본 문제 대다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하다. 이런 문제가 너무나도 복잡해서 그 분야의 ‘전문가’만이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실제로 중요한 문제에서 자신의 사고력을 믿고자 하는 용기를 ― 심지어 의도적으로 ― 빼앗기 위한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개인은 뒤죽박죽이 된 엄청난 양의 데이터 앞에서 망연자실 하면서 전문가가 어떻게 할지, 어떤 길로 갈지 알려줄 때까지 무기력하게 기다릴 것이다.



현대인은 모두가 ‘자신의’ 목표라고 우기는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엄청난 모험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위험과 책임을 감수하고 자기 자신의 목표를 정하는 데에는 심각한 공포를 느낀다. 혼신을 다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증거라는 착각에 빠지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 자아는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만큼 강하다 中



현대인이 느끼는 고립과 무기력의 감정은 인간관계를 통해 더 강화된다. 인간은 서로를 조종하고 서로를 목적을 위한 도구로 취급하며 서로에게 무관심하다. 모든 개인적 관계와 사회적 관계에서 시장 법칙이 통한다. 경제적 과제를 수행하려면 서로 싸우고 필요할 경우 서로를 경제적으로 파멸 시키는 짓까지도 서슴지 않는다.



쾌활함은 가면이었다. 그것은 마음에서 우러나오지 못하고 그저 ‘그’가 실제로 느끼는 공포와 화를 은폐할 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결심이 자신의 것이라고 우기며, 외부의 힘이 강요하지 않았는데 자신이 무언가를 원할 경우 그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확신한다. 하지만 그 확신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품는 큰 착각이다. 우리가 결심하는 것의 대다수는 실제 우리의 결심이 아니라 외부에서 암시된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우리 자신의 결심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지만 실제로는 타인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대로 행동한다. 그 이유는 고립이 두렵게 때문이며 우리의 삶. 우리의 자유와 안락이 직접적인 위험에 처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인간의 자긍심은 그의 성공에 달려 있다. 그가 이윤을 남기고 자신을 판매할 수 있느냐, 경력의 출발 시점보다 더 많은 것을 이루었느냐, 한마디로 그가 ‘성공했느냐’에 달려 있다.

- 인간은 자신의 인격을 시장에 내다 판다 中



신경증 환자들에게서 나타나는 무력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는 어떤 것에도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것도 움직일 수 없으며 나의 의지로는 외부 세계나 나 자신을 변화 시킬 수 없다. 아무도 나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공기와 같다.



우리 사회의 성인들은 사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무기력하다. 자신이 약한 것이 다 자기의 책임이라고 믿게 될수록 무기력이 더욱 심한 압박으로 다가온다. 그에게는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힘이 전혀 없다. 그가 어떤 능력을 갖출 수 있는지를 출생의 우연이 결정한다. 일자리를 구할 수는 있을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 수 있을지도 본질적으로 그의 의지나 노력과는 상관없는 요인들이 결정한다. 심지어 파트너를 선택하는 자유조차 경제적, 사회적 경계의 제약을 받는다. 기분, 의견, 취향은 주입된 것이며, 어떤 일탈을 저지르면 더 심한 고립으로 죗값을 치러야 한다. 세상이 활짝 열려 있다는 착각을 하며 시작한 사람들 중에서 어느 정도 독립된 경제적 안정을 이룬 사람의 비율이 얼마나 극소수인지는 통계를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현대인은 깊은 무력감에 빠져있다 中



보통 우리가 인간을 볼 때 경험하는 것은 사물을 볼 때 경험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가 특정한 한 사람을 본다고 믿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날까? 우리는 우선 부수적인 것들을 본다. 그 사람의 피부색, 옷을 입은 방식, 사회적 지위, 얼마나 교육을 받았는가, 그가 친절한가, 그가 우리에게 유익할 수 있는가 같은 것들을 본다. 

-진짜와 허울의 차이를 보다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