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명치나 맞지 않으면 다행이지

uragawa 2016. 9. 29. 23:15

회의의 기술
회의석상에서 남의 말은 듣지 않고 자기 주장만 들이밀거나, 다른 사람 의견을 자기 논리로 끌어들여 이용하려는 사람이 있다. 이런 식으로는 비난과 반발을 일으킬 뿐, 일 진행에 전연 도움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이런 병맛 짓거리를 회의의 기술로 착각하는 멍청이들이 있다.



좋은 물건을 만드는 데 흥미가 있는 사람은 돈을 버는 일에는 관심이 없다. 최대의 이윤이라는 떨떠름한 목표를 추구하는 사람은 경영자다. 현대 사회의 비극은 여기서 발생한다. 상품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의 모든 중요한 결정을 경영자가 내린다. 당연히 경영자는 좋은 물건을 만드는 데는 관심이 없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대략 이런 패턴을 따른다. 첫째 돈이 되네, 둘째 할 수 있네, 셋째 한다. 여기에 ‘왜 하지?’, ‘해도 되나?’는 없다. 그저 10원이라도 남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달려든다. 돈 외의 다른 목적은 없다. 이렇게 천박하니 그 번식력이 바퀴벌레 못지 않다.



생각하기 귀찮은 사람에게는 편리한 세상이다. 인생을 뭘하며 어떻게 살지 애써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다. 대기업에 붙어먹겠다는 확고한 목표만 좇으면 만사형통이다. 부모는 혹여 내 아이가 삼성에 취업하지 못할까 하는 걱정에 없는 살림 쪼개서 영어유치원을 보내고(영어 유치원 등록금은 삼성영어 킨더가든이 거둬간다.) 취업률이 높다고 자랑하는 대학교에 아이를 밀어넣는다.(대학 등록금은 성균관대를 인수한 삼성 그룹이 거둬간다.) 상상력이 부족한 점이 아쉽긴 하지만, 정부와 기업이 이끄는 대로 잘 따르니 일견 애국자로도 보인다. 물론 나중에 취직하지 못했다고 영어 유치원 등록금을 환불받는 일은 없다.



X세대라서 그런지, 아니면 남의 말이라면 덮어놓고 의심부터 하는 성향이라 그런지, 행복전도사 포스를 풍기는 중년의 연사가 ‘열심히 하면 다 잘될 거야.’라는 식 일반론을 내뱉는 꼴을 보면 반사적으로 역겨움을 느낀다. 그런 강연에서 나오는 얘기래야 누구나 생각해 낼 수 있는 진부한 조언이 대부분이다. 텔레비전을 하루에 네댓 번씩 보통 사람의 성공 사례를 방영한다. 그런 프로그램의 요점이 뭔가? 당신도 이렇게 열심히 살라고? 성공 못한 당신은 노력이 부족하다고? 그런 말 누가 못 해.



인생의 ⅓에 해당하는 잠자는 시간을 호화롭게 보내기 위해 나머지 ⅔의 깨어 있는 시간 동안 미친 듯이 일한다. 피로를 풀어 준다는 침대를 샀건만 여전히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배움에는 흥정이 없다. 누군가에게 무엇을 배우는 활동은 사고파는 행위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하지만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교육도 구매, 소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오죽하면 교육 사업이니, 교육 서비스니 하는 말까지 나왔겠는가.



지하철 플랫폼에서 승객이 내리길 기다리지 않고 정면으로 밀어닥치는 등산복 아줌마를 만나면 팔꿈치로 정수리를 내리치고 싶다. 어른인지 어묵인지 그딴 인간을 존중하고 싶은 마음은 조금도 없다. 빈자리에 앉을 요량으로 새치기와 육탄돌격을 마다 않는데, 그 정도 철면피라면 그냥 통로에 주저앉지 그러세요.



아저씨가 진상인 이유는 아줌마보다 악질적이다. 아저씨에게는 타인을 얕잡아보고 굴복시키려는 악랄한 권력욕이 있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 싶으면 어떻게든 뜯어고치려고 안달이다. 하지만 강한 상대 앞에서는 표정을 싹 바꾸고 비굴한 아첨에 돌입한다. 이보다 더한 꼴불견이 어딨겠는가.



행복하기 위해 우선 나의 행복이 무엇인지 알아내자는 것이 얘기의 핵심이다. 누구나 성공을 꿈꾸지만 무엇이 성공이냐고 물으면 구체적으로 답하지 못한다. 이는 우리 사회의 전형적인 패러독스다. 알지 못하는 목표는 달성할 수 없다. 무엇이 성공이고 무엇이 행복인지 모르는 사람이 과연 성공과 행복을 감지할 수 있을까?목표가 확실하지만 뭔가 부족해서 도달하지 못했다며 더 열심히 달리면 된다. 그러나 도달할 곳이 없다면 무엇을 해도 밑빠진 독에 물 붓기가 될 뿐이다.



“디자이너는 연봉이 얼마예요?”
진로 탐색 특강이 끝나고 어떤 학생이 물었다.
“2천에서 1억 사이.”
그러자 학생은 의중을 파악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대박.
나의 무성의한 대답이 대박인지, 디자이너 연봉의 널뛰기가 대박인지, 아니면 통일이 대박인지 대박인지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