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의 도서관

너를 놓아줄게

uragawa 2016. 6. 14. 23:00

어쨌든 오늘이 그날이다. 지금 당장 가지 않으면 영영 떠나지 못하리라는 사실을 직감하고 여행 가방에 들어가는 만큼만 짐을 꾸린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리라 생각하면서 집안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그렇게 생각하니 두렵고도 자유롭다. 내가 할 수 있을까? 현재 삶에서 벗어난다고 해서 새 삶을 시작할 수 있을까?




이곳에 남아 있을 수는 없고 어디로 가야할지도 알 수 없어서 걷기 시작한다. 자신과 게임을 하기로 한다. 어디로 향하든 다음 골목에서 왼편으로 꺾은 다음 다시 오른편으로 꺾어 처음 나오는 교차로에서 곧장 앞으로 갈 것이다. 도로 표지판을 보지 않는 대신 교차로마다 가장 좁은 길을 택한다. 사람들이 가장 덜 다니는 길을 간다. 어지러움을 느끼다 못해 발작을 일으킬 것만 같다. 지금 무엇을 하는 거지? 어디로 가는 거지? 이렇게 실성하는 걸까. 그러나 이내 알 게 뭐냐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어찌 되든 상관 없다.




그는 의자를 뒤로 젖히고 머리 뒤에서 손을 깍지 꼈다. 손에 닿는 머리숱이 얼마 되지 않았다. 갑자기 자신이 너무 늙고 지쳤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감았다.




사소한 일에 불과하지만 이제는 내가 생각처럼 그렇게 쓸모없는 인간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더 이상 직감을 믿지 않는다. 잘못된 직감 때문에 수없이 낭패를 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 쪽이 가장 안전하다.




패트릭에게 호감이 절로 솟아난다. “맛있어 보여요, 잘 먹을게요.” 내가 말한다. 누가 이렇게 나를 챙겨준 것이 얼마 만인지 기억 나지 않는다. 요리하고 집안을 정돈하는 등 가사를 돌보는 사람은 항상 나였다. 행복한 가정을 만들려고 오랫동안 노력했지만 삶이 무너져 내리는 결과만 얻었다.




얼어붙을 정도로 추운 날씨라서 물이 허벅지를 휘감자 숨이 막히지만 계속 움직인다. 더 이상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걷고 또 걸어서 바다 안으로 들어갈 뿐이다. 노호하는 소리가 들리지만 그 소리가 바다에서 나는 것인지, 내게 경고하는 소리인지, 나를 부르는 소리인지 가늠할 수 없다.




이제 너무 겁이 나서 다시는 바다 가까이에 가지 못할 것 같다. 내가 두려워하는 존재는 바다가 아니라 내 마음이었다. 내가 미쳐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많이 걷는다 해도 그 사실을 피할 수 없음을 안다.




재판정이 고요해지고 치안판사가 내게 감정 없는 시선을 고정한다. 터무니없게도 그를 향해 나는 이 재판정에 서는 사람들과 부류가 다르다고 외치고 싶다. 나도 당신과 같은 가정에서 자라났고 대학을 졸업했으며 디너파티를 열었고 친구도 있었다고 말하고 싶다. 한때 자신감 있고 사교적인 사람이었다고. 작년까지 법을 어긴 적이 한 번도 없으며 그날 있었던 일은 끔찍한 실수였다고. 하지만 그의 무심한 눈을 보자 그가 나라는 사람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의 법정에 들어온 범죄자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고. 다른 범죄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정확히 말하자면 일이 그립다기보다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가고 싶어요. 할 말이 있고 남들에게 가르쳐줄 만한 것이 있었던 때라 그리워요.”




“당신은 아이들이 자라나는 과정을 놓치고 있어. 얼마 뒤면 아이들이 집을 떠날 테고 당신도 은퇴하겠지. 그러면 당신과 나 뿐인데 우리는 서로 할 말이 전혀 없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