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진심으로 오싹했을 때 어떻게든 평정심을 되찾기 위해 공포에 쥐어뜯겨 움푹 팬 부분을 평평하게 고르려고 한다.
하지만 세월은 헛되이 하루 또 하루 얇은 종이를 떼어내듯이 흘러간다.
뭔가를 희박하게 만들고 조금씩 빛바래게 만들어간다.
기대를 품었던 시간은 실망으로 변하고 이윽고 체념에 들어간다.
마사지사에게 몸을 맡기고 끄덕끄덕 졸고 있으려니 낮에 본 몽찰의 잔재가 조금씩 녹아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반쯤 잠든 상태가 되면 히로아키는 항상 이즈미 교카의 소설이 떠오르곤 한다. 수술실에서 마취주사를 맞으면 자칫 마음속에 감춰진 비밀을 고백해버리지 않을까 걱정하는 여자의 이야기였다.
혹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이야기도 떠오른다.
비밀을 감춰두기란 어려운 일이다.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어디선가 토해내고 싶고 누군가 들어주기를 바라게 된다.
매사에 논리적인 사람은 두 부류로 나뉜다.
어디까지나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그에 따른 결론을 중시하는 타입과 논리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직감을 믿는 타입이다. 남자들은 두 부류가 섞여 있지만 여자들은 아무리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졌어도 최종적으로는 직감을 우선하는 부류가 많은 것 같다.
“차표 사올 테니까 여기서 잠깐 기다려요.”
이와시미즈가 그렇게 말하고 빠른 걸음으로 매표구로 향했다.
이로아키는 개표구 앞에 멍하니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총총걸음으로 지나가는 사람들.
문득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집을 나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는 것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누구나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반드시 어딘가에 존재한다. 그것이 엄청나게 신비로운 일로 생각되었다.
입맛이 지독히 씁쓸했다. 유이코의 고독. 유이코의 공포. 그런 것을 나름 이해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은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저것 좀 보세요. 안개가 자꾸 퍼지네요. 어쩐지 무서워요. 어디서 오는 건지 모르겠네, 이 안개.”
히로아키도 함께 바깥을 내려다보니 드문드문 오렌지 색깔의 불빛이 번져 보이는 가운데 주위가 온통 새하얗다. 준코의 말대로 골목길 안쪽에서 소리도 없이 안개가 물결처럼 밀려온다.
“그런 영화가 있었죠. 어느 날 한 마을이 갑작스럽게 하얀 안개에 뒤덮여요. 그 안개 속에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대한 괴물이 있어서 마을을 나가려는 사람들을 놓치지 않고 잡아먹는 이야기.”
“우리는 때때로 모습을 드러내는 일부만을 보고 그 세계를 깨달을 뿐이에요.”
안개가 조금씩 실내로 흘러들었다.
“게다가 그 일부는 지금까지 본 적도 없는 낯설고 이질적인 것이에요. 그러니 목격할 때마다 소스라치게 놀라고 허둥거리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모르지요.”
“몽찰 멀미는 직업병이라고들 하죠. 장시간 타인의 꿈을 지켜보면 점점 현실감이 상실됩니다. 혹은 자신의 꿈을 침식당하기도 해요. 잠이 얖아지고 사람에 따라서는 구역질을 하거나 현기증을 느끼는 등 건강을 해치는 경우도 있어요.”
“요시노의 벚꽃, 본 적 있어요?”
히로아키가 물어보자 이와시미즈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솔직히 말하면 벚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왜요?”
“만개한 벚꽃을 보고 있으면 왠지 무서워져서.”